퍼즐 풀듯 풀어본 '천황 메이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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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일본 최고의 개혁군주였나, 아니면 조정 중신들에게 놀아난 꼭두각시였나. 메이지유신(1868~1912)은 일본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기지만 정작 그 시기를 열어제친 주인공 메이지 천황의 역할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역설이다. 이런 사정은 이유가 있다. 13권이나 되는 공식 기록 『메이지 천황기』는 그가 직접 관여한 사건 등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일차 기록물로 남아 있고, 연구저작물 역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지만 정작 자연인 메이지, 정책을 결정·집행한 황제 메이지를 엿볼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교토(京都)대에서 수학했고 일본학술원 객원회원으로 일본통(通)인 저자가 이 점에 착안해 새롭게 '메이지 퍼즐'을 짜맞춘 것이 이 책이다. 먼저 자연인 메이지. 그는 '이런 사람'이라고 못박기 어렵다. 선제(先帝) 고메이와는 달리 속내를 엿볼 수 있는 일기나 편지를 남기지 않았다. 단카(短歌)에 능해 10만여수를 남겼다는 사실만이 그를 엿보는 데 도움이 안되는 휑뎅그렁한 사실로 남아 있을 뿐이다.

기질도 엇갈린다. 어렸을 때부터 소문난 개구쟁이여서 얻어맞은 피해자가 많다는 주장의 반대편에 체질적으로 허약해 병치레가 잦았다는 주장이 동시에 제기돼 있다. 저자는 주변의 진술들과 자료를 종합해 새 그림을 시도한다. 일부러 음식을 바닥에 떨어뜨린 후 시종에게 집어먹게 하는 가학성이 있었던 반면 내강(內剛)형으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편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황제로서의 메이지는 능동적 개혁군주와 순리에 따르는 처세주의자의 중간 어디쯤 위치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저자의 추정대로, 고메이 천황의 급작스러운 서거로 14세에 황위를 물려받은 메이지가 유신 이후 꼬리를 문 중대 변혁들에 능동적인 역할을 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메이지 원년인 1868년 영국 특명전권공사의 통역 자격으로 15세의 메이지를 알현한 영국인 미트포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상대로 조금 수줍어하는듯 보였다.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워 옆에서 큰소리로 되풀이 말해야 했다."(2백20쪽)

청·일 전쟁(1894년), 러·일 전쟁(1904년) 등 동아시아의 정치지형을 바꾼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에서도 황제 메이지는 정책의 입안자라기보다 인자한 통솔자의 역할을 했으리라고 저자는 추정한다. 물론 제위기간이 해를 거듭하며 부쩍 자신감이 붙었다. 1871년 봉건영주들에게 독립적인 영지를 허용하던 번(藩)을 폐지하고 대신 현(縣)을 세우는 개혁을 단행한 후 천황의 권위는 높아졌다.

하지만 조칙을 내려 청나라에 선전포고한 직후 고메이 천황릉에 파견할 칙사 인선을 묻는 대신의 질문에 "그럴 필요 없다. 이번 전쟁은 짐의 본의가 아니다. 각료들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바람에 허락했을 뿐"이라며 화를 냈다. 또 다음날은 순순히 칙사를 선정했다. 떼밀려서 전쟁을 결정해 심기가 불편했지만 사태를 돌이켜보니 전쟁을 중지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아버지 능에 보고하기로 했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다.

한국 독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대목은 민비 시해. 이에 대해서는 "(민비 시해를 주도한)미우라는 일단 결심한 것은 단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자이거든(2백39쪽)"이라며 무심히 넘겼지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말할 수 없이 낙담(4백39쪽)"했다고 한다.

상·하권 1천쪽이 넘는 신간의 미덕은 메이지 천황의 프로필을 그리는데만 있지 않다. 현재 콜롬비아대 명예교수인 저자는 일본 근대사는 물론 일본사와 맞물린 동아시아사를 풍부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어가며 자세히 풀어놓았다. 시간 여유를 갖고 도전한다면 읽는 재미가 쏠쏠할 듯싶은 이 책은 한국 독자로서는 약간의 비판적 거리감을 갖고 들여다 봐야 할 듯싶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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