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외계동물이 풀어준 주먹코 소녀의 소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경쟁자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설사 이기거나 앞서지 못하더라도.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은 상대를 이겨서라기보다 자신의 능력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보약'이다. 드림웍스라는 경쟁자를 만난 애니메이션의 종가 디즈니가 보여주는 자기변신 노력은 그래서 아름답다. 결과를 즐기는 관객 역시 행복하다. 1989년 '인어공주'로 시작된 디즈니의 르네상스는 94년 '라이온킹'으로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95년 2월 드림웍스가 등장했다. 그래서일까. 95년부터는 겨울시즌용도 등장했다. 컴퓨터 제작사인 픽사와의 제휴가 일종의 물량공세가 된 셈이다. 내용도 달라지고 있다. 모범생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를 계승하던 전통은 특히 '쿠스코 ? 쿠스코 !'이후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는 자유분방함 쪽으로 크게 기울어졌다.

<표참조>

올 여름 신작 '릴로와 스티치'를 보면 디즈니의 변모를 더욱 잘 느낄 수 있다. 주인공은 잘생기거나 멋진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말썽꾸러기에 주먹코를 가진 하와이 원주민 꼬마 소녀 릴로. 언니와 둘이서만 사는 릴로는 험상궂은 사회복지사에 의해 다른 집으로 입양될 처지에 있다. 언니와 싸우고 화해하기를 되풀이하던 릴로는 어느 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심상치 않은 별똥별을 보고 소원을 빈다. "천사 같은 친구를 보내주세요." 그리고 릴로는 별똥별의 주인공을 만나 스티치라는 이름을 붙여 주고 집으로 데려온다.

어디서 본 듯하지 않은가. 별님에게 소원을 빌던 할아버지가 나오는 '피노키오'와 아이들의 집으로 가게 된 'ET'. 게다가 스티치를 잡으러온 외계인 총사령관은 사회복지사와 알은척을 한다. 알고 보니 사회복지사는 전직 CIA요원으로 로즈웰 사건(외계인이 미국 로즈웰 지역에 불시착했다는 의혹) 당시 구면이란다. 이건 'X파일'이군. 그래서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패러디'다.

개성 강한 릴로와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스티치는 티격태격하면서도 점차 정이 들어간다. 스티치를 모범 시민으로 만들라는 사회복지사의 주문에 릴로가 스티치에게 보여주는 모델은 엘비스 프레슬리. 그때부터 불후의 명곡 '버닝 러브'를 비롯해 '캔트 헬프 폴링 인 러브 유' 등이 작품 곳곳에서 신나게 편곡돼 흥을 돋운다.

여기에 커다란 꽃무늬가 새겨진 옷차림의 릴로 언니와 그 애인이 등장하고 하와이 민속 훌라춤과 가슴이 탁 터지는 듯한 파도 타기, 원주민들의 불춤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디즈니 장편 애니메이션 사상 60년 만에 다시 사용했다는, 수채화 기법으로 처리된 배경은 맑고 투명한 하와이의 절경을 잘 표현해 냈다. 그래서 이 작품의 둘째 특징은 전통 문화와 복고다.

그런데 외계로 끌려가기 싫어 애완동물을 자청한 스티치. 팔이 네개에 엄청난 괴력과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골치아픈 악동이다. 보는 것은 뭐든지 부숴버려야 성이 풀리는 성품은 현대인들의 파괴 본능을 그대로 닮아있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크게 회자됐던 '엽기' 는 셋째 특징이 된다.

디즈니는 스티치가 현대인들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미키 마우스를 아주 밀어낼 수야 없겠지만, 자기 멋대로 에서 따뜻한 마음을 갖게 된 스티치가 보여주는 매력은 독특하다. 그래서 미국의 디즈니 스토어는 이미 스티치에 의해 점령됐다는 것이 브에나비스타 코리아 민자경 대리의 전언이다.

실제로 '릴로와 스티치'는 미국 개봉 당시 첫 주말 사흘간 3천5백79만5천달러라는 기록을 세우며 2위를 차지했다. 1위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3천6백90만달러에 거의 육박하는, 역대 디즈니 애니메이션 사상 '라이온 킹'과 '다이너소어' 다음가는 기록이다.

영화는 스티치가 태어난 행성으로 다시 끌려가기에 앞서 릴로를 '나의 가족'이라고 소개하는 데서 절정을 맞는다. 그리고 모두 행복해지는 전형적인 해피 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가족간의 사랑이 세상의 모든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디즈니식 주장이 이제는 물린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란한 가족의 모습이 점점 깨져나가는 현실에서 가족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19일 개봉.

정형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