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上 질적 도약 이뤘다> 돈·아이디어·경험 삼박자 척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한국 애니메이션이 꿈틀댄다. 남의 부탁을 받아 손품을 팔던 하청 수준의 얘기가 아니다. 우리가 아이디어를 내고 우리가 만든 창작품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맞아 변신과 대도약을 꿈꾸는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재와 미래, 빛과 그림자를 분석한다.

편집자

언제부턴가 라디오에선 팝송보다 가요가 더 많이 들리기 시작했다. 극장에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서는 한국 영화가 늘어났다. 많은 아이들이 이제 미키 마우스나 피카츄 대신 국산토끼 마시마로를 안고 잔다.

한국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는 시작된 것인가. 월드컵으로 한껏 고양된 분위기까지 타게 된 애니메이션계는 '이제는 우리 차례'라며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실제로 우리 작품에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지난 6월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마리이야기'가 국내 작품 사상 최초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어 열린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페스티벌에서도 '일곱살'이 학생부문 특별상을 받았다. 오는 10월 캐나다 오타와 페스티벌에서는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사상 처음으로 한국 작품 특별 상영전이 마련된다.

순수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다. 세계 바이어들이 모이는 프로그램 마켓인 미국의 NATPE·프랑스 MIP-TV·캐나다 BANFF 등에서는 "정말 한국에서 만들었느냐"는 질문 공세와 함께 공동투자·공동제작 계약 상담이 줄을 이었다. 세 군데서만 얼추 계산해 1천5백만달러(약 1백80억원)규모다.

업체들의 참가를 도와준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이상길 애니메이션산업팀장은 "이들이 점점 자신감을 갖게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큰 보람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올 가을 이후엔 극장용 대작들이 속속 선보인다. 1백억원대의 제작비가 들어간 화제작 '원더풀 데이즈'를 비롯해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을 자랑하는 '엘리시움'과 '아크', 고 정채봉씨의 동화와 만화가 천계영씨의 밀리언셀러를 원작으로 한 '오세암'과 '오디션', 세계 최초의 극장용 플래시 애니메이션 '위싱 스타'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워너브러더스 TV를 통해 미국 전역에 방영되며 '포켓몬스터'와 시청률 수위 경쟁을 벌였던 '큐빅스'의 제작사 시네픽스는 차기작 '아쿠아 키즈'를 선보일 예정.

1967년 국내 최초의 장편 '홍길동' 이후 몇년 간의 1차 중흥기, 76년 '로보트 태권V' 이후의 2차 중흥기, 96년 '아기공룡 둘리-얼음별 대모험' 전후의 3차 중흥기에 이어 바야흐로 4차 중흥기가 형성되는 기세다.

여기엔 여러 이유가 있다. 우선 업체의 체질 개선이다. 'IMF시절'을 전후해 하청 물량이 중국·필리핀·베트남 등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이들은 앞으로 창작물이 없으면 끝장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처음으로 기획실이란 게 생기기 시작했다.

몇몇 메이저 제작사들은 대기업 출신 경력자 스카우트에 나섰다. 코코엔터프라이즈 전명옥(46)부회장은 케이블 만화채널 투니버스의 창사 멤버이자 동양제과 일본 지사장을 역임한 이동욱(37)씨를 사장으로 앉히는 파격인사를 지난해 10월에 했다. 17년간 대우전자 영업부에서 일해온 이재관(48)부장을 3년 전 마케팅 담당 이사로 영입한 선우엔터테인먼트 강한영(55)회장은 얼마전 MBA 코스를 마치고 돌아온 길종철(39)전 삼성영상사업단 애니메이션 팀장을 콘텐츠기획개발담당 상무이사로, 이헌숙(48)전 서울신문 문화부장을 홍보이사로 각각 발령냈다.

코스닥에 등록된 회사들은 사업다각화에 한창이다. 한신코퍼레이션과 코코엔터프라이즈는 게임·IMT2000 등에 진출했고 대원C&A홀딩스는 지난 3월 디지털 위성방송용 애니메이션 채널 애니원(CH 655)을 개국했다.

둘째, 뭉칫돈들이 애니메이션 제작 현장에도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아이픽처스·삼성벤처투자·무한기술투자·KTB·신보창투·튜브엔터테인먼트 등이 대표적인 투자사들이다. 투자펀드로는 일신애니메이션 투자조합과 손오공 신보투자조합 등을 꼽을 수 있다.

셋째, 전문 인력의 증가다. 90년 당시 공주전문대에 만화학과가, 96년 세종대에 만화애니메이션 학과가 생긴 이래 현재 전국에 80여개가 넘는 관련학과가 설치됐다. 2000년에는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도 하남시에 개교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넷째, 정부 및 방송사의 지원도 한몫했다. 문화관광부를 비롯해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영화진흥위원회·서울산업진흥재단·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등은 제작비 지원·해외 마케팅 지원 등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98년 시작된 국산애니메이션 TV 의무방영 비율제는 업체들의 창작열기를 독려하는 배경이 됐다.

하지만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의 미래가 장밋빛만은 아니다. 오히려 디지털 관련 환경의 변화, 어린이와 청소년의 소비패턴 이동, 9·11 테러 이후 사회경제적 악재에 따른 불확실성이라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다.

이제 막 물이 오르기 시작한 한국 애니메이션이 환하게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과 성원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형모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