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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리즈를 열며 … 9·11 폐허에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2001년 9월 11일 오전 9시경, 세계무역센터(WTC) 인근 맨해튼의 한 호텔. 유엔 NGO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 곳을 들른 경희대 교수 일행은 잠에서 깨어나 그날 오후 일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갑자기 건물 밖에서 들리는 소란함과 복도를 울리는 급한 발자국 소리…. 누군가 급히 방문을 들어서며 "사고가 났어요 ! 빨리 CNN을 틀어보세요"라고 말했다. TV에서 반복적으로 들려 오는 리포터의 격앙된 목소리는 이후에 벌어질 '차이의 비극'을 예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창문을 연 순간 쌍둥이 빌딩은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서서히,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화염은 일행이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던 창문을 향해 폭풍처럼 돌진해오고 있었다.

며칠 후 시신과 건물 탄 냄새로 뒤범벅이 된 맨해튼을 뒤로 한 채 우여곡절 끝에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사마 빈 라덴, 알 카에다, 탈레반, 여객기 돌진 테러…. 건물이 무너져 내린 전율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일행에게 던져진 이런 단어들은 아직 실감있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리고 약 9개월 후인 지난 6월 취재진 일행은 다시 현장을 찾았다. 재건축 준비를 위한 건설회사의 퀀셋 건물만이 즐비한 이곳은 이제 뉴욕 시민들 사이에선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옛 냉전시대 미·소간 핵전쟁 시나리오에서 유래한 이 군사용어는 핵폭발지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본토가 첫 공격을 당한 세계무역센터를 바로 '그라운드 제로'라고 부르며 그날의 비극을 되새기고 있었다.

"9·11은 알라신의 부름이다. 미국의 이슬람에 대한 압박과 탄압이 끝날 때까지 투쟁은 계속될 뿐이다." 빈 라덴은 9·11 참사를 '성전(聖戰)'으로 정의했다. 그러자 분노에 찬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정의'를 외치고 나섰다. "세상에는 악의 무리들이 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그들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성전'과 '정의'라는 숭고한 이념이 오히려 비극을 만들어내는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혼란이 취재기간 내내 우리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사실 양 진영의 숭고한 말들은 테러와 응징을 각자의 입장에서 정당화하는 서로 다른 면을 보여줄 뿐일지도 모른다. 9·11 참사의 근저엔 인간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첨예한 인식 차이가 깔려 있다. 미국이 이슬람권의 비애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친이스라엘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해 왔다고 믿는 아랍인들. 수없이 자행된 테러의 비극이 이슬람 원리주의의 호전성에 의해 촉발됐다고 생각하는 미국. 해묵은 중동사태를 배경으로 한 9·11 참사는 이처럼 서로 다른 인식의 뒤틀린 역사에 다름 아니다.

역사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낯선 이방인의 자기중심적 행동을 생리적으로 거부하게 마련이다. 또 때에 따라선 상대에 대한 불신과 지나친 경계심이 피의 역사를 부른다.'

역사를 반추할 때 역사는 '차이(差異)의 비극'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정의·사랑·진실·선(善)은 언제나 그 내면에 부정의, 미움·거짓·악을 숨기고 있었다. 차이는 숭고한 이상을 추악한 현실로 만든다. 차이를 빌미로 인위적 적대행동을 기획하고 배제와 패권의 의지를 불사른 경우 비극의 역사는 어김없이 우리를 찾았다. '악의 제국'과 '악의 축'은 각자가 강조한 '성전'과 '정의'의 또다른 모습이었으며, 동일한 언어 속에 숨겨진 극단적 차이는 숙명적인 '피의 경계'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런 경계는 뉴욕의 테러현장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종교·언어·지역이 갈라지는 곳은 물론 우리가 이룩한 근대문명 내부, 기술이 만들어낸 가상과 현실 사이에서도 이런 경계는 끊임없이 재생하고 있다. 더욱이 세계화는 차이를 제거하려는 의지를 드러내면서 이런 '피의 경계'는 더욱 확장될 것을 예견하고 있어 인류문명의 앞날에 비극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다.

'뉴욕 나비의 날갯짓이 베이징(北京)에 폭풍우를 몰고 올 수 있다'는 인식처럼 온 인류는 이제 촘촘히 짜여진 '인과(因果)의 그물'에 운명을 내 맡기게 됐다.

특히 생산수단과 과학기술, 소통과 정보체계가 빠르게 발전함에 따라 국가와 사회, 개인의 접촉공간은 전례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은 비극의 장(場)이 될 것으로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9·11 테러는 그 첫 단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제 이런 비극에 어떤 식으로든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종래에 극복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차이를 대화와 소통, 화해와 타협이 가능한 '차이의 미학(美學)'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치 "신이 그것(전쟁)을 원한다"는 수사(修辭)가 난무했던 중세 십자군전쟁을 연상케 하는 오늘의 현실은 이와 같은 요청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마지막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지구촌 미래를 결정할 현실엔 창조의 공간이 있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현실은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은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의 의식을 포함한다. 그리고 바로 이 '실재의 현실'엔 물리적 충돌을 피하며 차이의 미학을 실현하려는 인류의 양심이 살아 숨쉴 수 있다.

"현대문명의 변방으로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정치적 배려와 관용 없이는 미국과 세계의 미래는 없어 보인다. 모두가 다 망할 뿐이다." 한 미국인 NGO 인사가 9·11 테러 당시 우리 일행에게 한 말이다. 그리고 지금 애국주의가 물결치는 미국의 심장부, 뉴욕의 사라진 세계무역센터 자리에서 취재진이 본 미국은 과연 차이에 대한 관용을 준비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나마 차이의 인위적 위험을 경계하는 인류양심의 지구적 연대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 보면서 그 현장을 떠났다.

뉴욕=조인원 교수(경희대 NGO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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