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주문 늘면 겁나"中企 아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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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생산현장에 오랜만에 경기회복의 훈풍이 불고 있지만 일할 사람이 없어 기업들은 발을 구른다. 공단마다 사람을 구하느라 난리인데 구직자들의 발길은 뜸하다. 조선 등 기간산업에선 노령화 현상이 심각해 30대 이하의 젊은이들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쓸 만한 연구개발 인력이 부족하다는 기업들의 아우성도 높다. 경제의 뒷다리를 잡는 총체적 인력난의 현장을 세차례로 나누어 살펴본다.

편집자

"주문이 늘어나도 겁이 납니다. 사람을 구할 수가 있어야죠…."

지난 5일 경기도 안양시 필동에 있는 플라스틱 사출업체 피닉스전자부품. 넥타이 차림의 김재기 사장은 외국인 산업연수생과 함께 자동조립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디오 테이프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직원 18명을 두고 있지만 일손이 달려 金사장은 물론 부인과 대학생인 세 아들까지 작업을 거들고 있다.

오디오 테이프와 통신장비 부품을 만드는 이 업체는 최근 경기가 풀리면서 주문량이 지난해에 비해 30% 가량 늘었다. 고질적인 인력난의 체감지수는 그만큼 더 높아졌다.

"생활정보지·인터넷 등에 구인광고를 내고 장애인근로복지공단에까지 문의해 봤지만 반응이 없더군요. 어쩌다 찾아오는 사람도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둡니다."

이 공장에는 현재 10명 가량 사람이 모자란다. 손이 없어 6천만원짜리 사출기 한 대는 뽀얀 먼지를 뒤집어쓴 채 6개월째 멈춰서 있다. 빠듯한 형편이지만 인력난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업체 규모에 비해 큰 돈인 2억원을 들여 자동조립기를 갖추기도 했다.

金사장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곳은 7명의 외국인 산업연수생이다. 이들이 공장에서 이탈할까봐 金사장은 연수생들의 적금 통장을 관리하면서, 자신의 호주머니를 털어 1년에 한번씩 일주일간 고향에 보내주는 등 정성을 쏟고 있다. 金사장이 보여준 이들의 월급명세서는 잔업수당을 합쳐 1백만원이 넘었다.

경기회복과 함께 중소기업들도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으나, 사상 최악의 인력난이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홍순영 상무는 "중소기업인들은 제조물책임(PL)법 시행, 금융기관 주5일 근무제, 사상 최악 수준의 인력난이라는 3중고가 모처럼의 호기를 앗아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며 "이중 인력난이 가장 심각한 애로"라고 말했다.

사람을 구하기 어렵기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업체도 마찬가지다.

수도권의 대표적 중소기업 공단인 남동공단. "생산직 직원 ○○명 모집" "기능직 근로자 우대". 남동대로와 그 주변 골목길 곳곳에는 인력을 구한다는 현수막과 벽보가 어지럽게 붙어 있다.

90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남동공단 2단지의 라니정밀은 프레스공이 모자라 항상 사고위험에 시달리면서도 속수무책이다. 보일러 및 전자 부품을 만드는 이 업체는 프레스기계 18대를 8명의 기술자가 관리하고 있다. 적정 인원보다 5~6명이나 부족하다. 김연태 총무부장은 "주문이 늘었지만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잔업으로 메우고 있다"며 "잔업수당으로 인한 추가 인건비가 월 1천만원을 넘고 있다"고 말했다.

근처에 있는 건축내장재 생산업체인 서한메라민은 아예 관리·사무직이 수시로 생산현장에 투입된다. 이 회사 이균길 사장은 "최근 주문이 많아져 생산시설을 두배로 늘렸지만 사람을 구할 수 없어 시간에 쫓길 때는 사무실 직원도 나선다"고 말했다.

최근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와 중소기업연구원이 중소 제조업체 4백1개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중소 제조업체 생산직 인력부족률은 11.5%. 종업원수 20명 미만 소기업의 생산직 인력 부족률은 19.3%에 이르렀다.인력부족 현상은 해마다 있었지만 경기가 활기를 띠는 요즘 더욱 심각하다.

문제는 이같은 인력부족이 앞으로도 해소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 병무청이 병역 대상자 감소를 이유로 한해 2만명이던 산업기능요원을 절반 이하로 줄이겠다는 방침을 발표한 데다 산업연수생 확대방안도 높은 이탈률이 걸림돌이 되면서 결론이 미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 인력난은 우리 산업구조의 재편과정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중소기업연구원 유재원 동향분석실장은 "전통 제조업에서 첨단 IT·서비스 쪽으로 산업의 무게가 옮겨가면서 낮은 임금과 열악한 근로환경을 벗어나지 못하는 굴뚝산업으로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고 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인들은 현 상태의 인력난을 방치했다가는 우리 제조업의 근본이 와해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김영수 기협중앙회장은 "특별조치법을 제정,범국가적 차원의 재정·금융·세제지원을 통해 생산현장으로 사람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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