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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행적 좇았지만 깊은 인격 다 못담아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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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림을 감상할 때 어느 정도 거리가 필요하듯, 사람도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일상의 모습이 다 들여다보여 신비감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원불교 2대 종법사를 지낸 정산(鼎山)종사(1900~62)는 그를 시봉했던 박정훈(68)원불교 서울교구장에게는 '가까이 하면 할수록,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더욱 넓어지는 인격의 황금밭'이다. 정산종사가 열반할 때까지 그를 가까이서 모시며 가르침을 받았던 박교구장이 20년 동안 땀흘려 수집한 자료와 증언을 바탕으로 정산종사의 삶과 가르침을 정리한 『정산종사전』(원불교 출판사)을 펴냈다. 원불교에서 나온 인쇄물을 샅샅이 뒤져 정산종사 관련 글을 다 읽고, 그 분에게서 어떤 형태로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되는 출가자와 재가자들을 두루 찾았다.

"그 어른의 절절한 말씀과 깊은 뜻을 온전히 받아내기 위해서는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북 성주와 전남 영광, 전북 부안 등 그 분이 생전에 자주 다녔던 곳을 돌면서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했습니다."

2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린 것은 원불교 안에서 주어진 일에 충실하느라 자투리 시간을 내다보니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자신이 성현의 참모습을 담아낼 그릇이 아직 되지 못했다는 판단에서였다.

정산종사는 원불교를 연 소태산 대종사의 수제자였으며 대종사에게서 종통을 이어받은 이후로는 각종교재와 조직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지인들 찾아 자료 수집

"'부처님'을 그려내려면 어느 정도 그 경지에 다다라야 하는데, 공부가 얼른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세월은 쉼없이 흘러가고…, 그래서 훌륭한 후배들이 정산종사님의 본 모습을 1백% 드러내주길 기대하면서 아쉬운 대로 이쯤에서 마감했습니다. 짠 물 한방울로도 바닷물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위안도 있습니다."

박교구장은 원불교와 인연을 맺은 뒤로 줄곧 정산종사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누렸다. 초반엔 정산종사 조실에서 청소를 담당했고, 정산종사가 총재를 맡았던 '대종경편수위원회'의 주사를 지냈으며 그 후 정산종사가 열반하기 1년 전까지 3년간 시봉했다. 정산종사와의 인연을 박교구장은 '일생이 아니라 영생의 행복'이라고 회고했다.

"정산종사께서 무섭게 대할 때는 동지섣달 설한풍이 이는 듯했습니다. 그것도 다 가르침의 방편이었지요. 툭 던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는 그대로 진리였습니다. '인과(因果)가 무서워 옳은 일 못하는 사람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보다 못하다''내가 내 스스로를 양심으로 인정한 후에라야 다른 사람들이, 더 나아가 이 우주가 나를 인정하게 되는 법'이라는 식이었으니까요."

박교구장이 정산종사의 전기를 쓰기로 작정한 것은 원불교 총부의 교화부장을 맡으면서였다.

"사람이 인격으로 부처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교화인데, 성현들의 삶과 정신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쉬운 방편이라는 판단이 섰어요. 영성을 얻고 다지는 데는 불경이나 성경 같은 경전을 읽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을 저 자신이 경험했습니다."

실제로 박교구장의 구도심(求道心)을 일으킨 것은 원불교 『대종경』이었다. 중학교를 마치던 1952년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워 일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하던 중 원광중·고등학교의 박장식 교장과 인연이 닿았다.

박교장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헤아릴 수 없지만, 어쨌든 박교장은 박교구장에게 『대종경』 초안을 건네주면서 42일간 계속 베껴 쓰라고 주문했다. 그 초안에 담긴 내용 중 지극히 사적이라는 이유로 『대종경』에 실리지 않은 대종사의 일화가 박교구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종사와의 인연 큰 행복

"이공주라는, 요즘으로 치면 여성운동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대종사를 처음 만나는 대목입니다. 대종사께서 '네가 원하는게 뭐냐'고 물었어요. 이공주는 '이 나라 1천만 여성을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종사께서는 '이 세상에 무수한 생명이 있는데 너는 하필 1천만 여성만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소리에 이공주도 출가를 결심했고, 저도 깊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당시 박교구장의 꿈은 고시에 합격해 억울한 사람을 구하고 가난한 학생을 돕는 것이었다.

그때 『대종경』 초안을 여러 차례 베낀 덕에 박교구장은 20대 중반부터 대종경 강의로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박교구장은 "공부하다가 막히는 게 있으면 정산종사에게 묻곤 했으니 실은 정산종사의 강의였던 셈이지요"라며 웃었다.

박교구장은 정년인 올해 말에 서울교구장 자리에서 물러나면 원로원에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게 된다.

정명진 기자

박교구장 약력

▶1934년 전북 남원 출생

▶54년 출가

▶58년 원광대 원불교학과 졸업

▶60년 정산종사 시자

▶77년 교화부장

▶82년 『한울 안 한 이치에』출간

▶2000년 서울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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