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의 경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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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자선가의 얼굴을 한 투기꾼'으로 유명한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조지 소로스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는 소식이다. 소로스는 "부시는 글로벌 경제를 다루는 능력에 있어 전혀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면서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있는 것은 부시 행정부의 무능 때문이라고 몰아붙였다.

미국 증시가 맥을 못추는 것도 부시 탓이라고 비판한 소로스는 최근의 미 증시를 '부시 베어 마켓(Bush bear market)'이라고 조롱했다.부시의 위기관리 능력 부재 때문에 침체된 증시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향후 2~3년 내 달러화 가치가 3분의 1 이상 떨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의도한 방향으로 시장을 움직여 이득을 챙기려는 '큰 손'다운 예언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최근 미국 경제의 흐름이 영 심상치 않다. 월드컴 회계부정 사건의 파문이 일파만파로 커지면서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 제2의 장거리 전화회사인 월드컴이 이익을 부풀리기 위해 각종 비용을 투자로 계상하는 수법으로 38억달러에 달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분식회계를 자행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미국 기업과 경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회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한 두 기업의 돌출적 비리로 치부하고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최근 들어 미국 기업들의 회계부정 사건은 꼬리를 물고 있다. 미국 최대의 에너지 유통업체인 엔론이 회계 조작 스캔들로 이미 파산한데 이어 임클론 시스템스, 아델피아 커뮤니케이션스, 타이코 인터내셔널과 세계 최대 자동차 업체인 GM 등이 당국의 조사를 기다리고 있다. IBM과 제록스에서 글로벌 크로싱, 퀘스트, 선빔, AOL-타임워너에 이르기까지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기업도 여럿이다. 저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매년 쌓이는 경상수지 적자가 4천억달러에 이르는 미국 경제가 굴러가려면 하루 평균 12억~13억달러의 달러가 외부에서 유입돼야 한다. 투자처를 찾는 금융자본들은 미국 기업의 투명성과 건전성·수익성을 세계 최고로 평가해 왔고, 이러한 신뢰는 지금까지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주춧돌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달러화 가치가 유로화와 1대 1 수준까지 떨어지고, 주가가 폭락하면서 미국발 금융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약화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소로스는 "도덕적 원칙보다 성공만을 중시하는 미국 문화의 한 단면을 반영한 것"이라면서 미국의 최고경영자(CEO)들을 짓누르고 있는 실적 지상주의를 성토하고 있다.

아시아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소로스는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란 책에서 '시장 근본주의'의 위험을 경고한 바 있다. 시장에 맡겨두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갈 것이라는 시장 만능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맹신은 정치의 타락과 정치에 대한 환멸을 낳고, 이는 다시 시장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구조적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세계 자본주의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사익을 위한 개인적 의사결정의 총합인 시장과 공익을 위한 집단적 의사결정의 총합인 정치가 서로 균형을 이룰 때 위기 극복이 가능하다고 소로스는 주장한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정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미국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익숙해 있던 우리로서는 세계 자본주의의 메카에서 들려오는 잇따른 경보음이 혼란스럽다. 소로스가 환투기로 큰 돈을 벌었다는 사실은 금융시장과 자본주의의 허점과 구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경고가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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