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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함께 즐기는 축제의 場 자주 만들자"-놀이문화 살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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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한달간 계속된 장엄한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를 만들어 낸 배우들은 무대 뒤로 사라지고, 감동과 환희를 맛보았던 관객만이 남았다. 이제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월드컵에서 보여준 국민적 에너지 대폭발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인지, 그 이후 다시 평상심으로 돌아온 '우리'는 월드컵의 열기를 어떻게 승화시켜야 할지 전문가 좌담을 통해 짚어본다.

-월드컵에 쏟아부었던 열광과 흥분 뒤에는 허탈감이나 공허감이 올 수 있다고도 하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사나"하는 탄식도 나온다고 하는데요.

▶김병후=물론 재미라는 자극이 없어지면 허전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정신의학적인 일종의 진공상태나 집단 우울증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월드컵을 통해 보여준 국민의 열정은 과거 독재정권 시절처럼 억압된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놀이 그 자체였습니다. 에너지의 본질이 달랐던 거죠. 찌든 삶에서 신나는 삶, 즐거운 삶으로의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국민의 정신건강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된 셈이지요.

▶정진홍=월드컵 패닉 현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거리 응원의 주역인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문화적 코드는 전혀 다릅니다.'대~한민국'을 외치는 세대에게선 근엄·권위 속에 어깨가 무거워지는 '대한민국'세대와는 달리 경직성을 찾아볼 수 없어요. 그들은 유연하게 또 다른 재미를 찾아갈 겁니다.

▶김정운=젊은 세대는 과정이 재미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이라는 목표가 성취됐을 때 비로소 행복하다고 느끼는 기성세대와 다르죠. 결과가 아닌 과정을 즐기기 때문에 공허감도 그다지 크지 않을 것입니다.

-폭발적인 열정이 국민 정서에는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정진홍=바이러스에 감염되듯 젊은 열정이 기성세대를 포함한 전국민의 폭발적인 성원을 이끌어 낸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현상입니다. 10여명의 젊은이들이 시작한 붉은 악마의 에너지가 폴란드전 때는 50만명, 독일전 때는 7백만명의 거리응원을 끌어내지 않았습니까. 플러스 발상의 감성 바이러스가 음울한 패배주의를 극복하고, 국민적 에너지를 응집시켜 자신감·자긍심·자기 존중심을 키우는 계기가 됐습니다.

▶김병후=우리나라 사람들은 환경이 좋아져도 여전히 일 쪽에 무게중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번 월드컵을 보면 행복을 느끼는 게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일은 아니거든요. 우리를 놀 수 없도록 만드는 조건을 찾아내 제거함으로써 재미를 일상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김정운=저는 이번 월드컵을 재미라는 측면에서 평가하고 싶어요. 전 국민이 함께 즐기는 재미의 코드를 찾은 것이지요. 어떻게 즐길 수 있느냐 하는 방법,즉 축제의 본질을 터득했습니다. 과거 독재정부 주도의 '국풍(國風)'이 국민적 호응을 얻지 못한 것처럼 흥은 스스로 참여해야 절로 나는 것입니다. 이번의 신바람 문화를 확대 재생산해 나가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잃어버렸던 재미와 행복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찾았다는 말씀인데.

▶김병후=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잘 노는 것입니다. 기성세대의 경우 노는 것도 간섭을 하고 규제를 합니다. 공허함으로부터 탈피하려면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는 것을 찾아서 해보는 게 방법입니다. 인간의 재미는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거든요. 결국 어른들의 엄숙주의·계몽의식·경건주의의 시각으로 월드컵을 보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심층에 분노가 담긴 세대와는 다른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시는군요. 그렇다면 기성세대에게 월드컵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김정운=우리는 노는 것을 보면 괜히 불안해 했죠. 그러다 보니 가족과 함께 하는 놀이문화가 거의 없어요. 아버지는 가정이 아닌 곳에서 남자들끼리 어울리고,아이들은 부모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로 놀았지요. 이제 사람들은 많은 돈이나 거창한 계획 없이도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소재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을 겁니다. 가족이 공유하는 재미의 코드를 찾은 것이죠. 아마 거리응원이든, 가정에서든 월드컵을 가족과 함께 즐긴 사람들은 주 5일 근무제의 여가활용 방법도 터득했을 겁니다.

▶김병후=우리는 본래 감성적이고 신명 있는 민족입니다. 하지만 지난 한 세기의 억압에 의해 이러한 흥이 감춰지고, 즐거워하거나 재미있으면 안되는 사회가 됐죠. 또, 누가 잘되면 끌어내리고 미워해야 하는 그런 분위기가 가득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직장에서 가정에서, 신이 나고 즐거워하는 방법을 다시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국민적 축제의 장(場)을 정례화할 필요도 있습니다.

-재미 속에서도 일사불란한 통일성이 있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정진홍=이번의 폭발적인 에너지는 그동안 우리가 경험했던 억압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환희에 넘치고 자신감으로 충만한 포지티브 에너지이지요. 또하나 중요한 것은 열정을 발산하면서도 책임을 질 줄 아는 고품질의 사회를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김병후=초대형 거리응원을 하면서 큰 사고나 행패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응원 후에 스스로 청소하는 모습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심성에선 찾아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것들이지요.

▶정진홍=이제 우리도 개별성과 전체성이 공존하는 사회가 된 것이죠. 자기자신에 충실하면서도 집단에서 하모니를 찾는 새로운 인간 군(群)의 탄생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흥의 문화를 어떻게 이어가야 할까요.

▶김병후=우리 사회나 가정문화는 간섭의 문화지요. 퇴근해서 들어가면 무엇을 해야 즐거울까를 생각하기보다 아이들 공부 점검하는 것이 먼저지요. 이러한 규제 속에서 진정한 행복은 찾을 수 없습니다. 월드컵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정진홍=이번 기회에, 목표를 좇던 사회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사회로 전환돼야 합니다. 사회발전도 축구와 같이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지요. 전반전이 목표를 향해 뛰었다면 후반전은 삶의 의미를 가꾸는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하프타임은 바로 나의 존재·가족, 그리고 인생의 재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하프타임에 와 있습니다.

▶김정운=중요한 것은 이 에너지의 승화 작업이 관(官)주도형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목적은 행복해지고 즐기는 것입니다. 이념과 정책이 들어가면 판이 식어버립니다. 정부는 내적 동기를 유발할 수 있도록 놀이문화를 만드는 인프라만 깔아줘야 합니다. 말하자면 젊은이들에게 맞는 문화적 코드를 찾아주자는 것입니다.

▶김병후=상대방이 잘못하면 비웃고 헐뜯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네 풍토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재미없게 살아왔지요.거리응원의 질서의식과 격려·지지·포용능력에서 보듯 이제 사회든 직장이든 가정이든, 남을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 좀 그만 했으면 좋겠어요. 이번에 '우리는 썩 괜찮은 민족'이라는 걸 보여줬지 않았습니까.

▶정진홍=정치적 에너지가 아니라 문화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스페인은 1982년 월드컵을 통해 프랑코 총통이라는 독재국가의 이미지를 씻고, 대신 매력적이고 열정적인 문화·관광 산업국가의 이미지를 부각했습니다. 관광수입이 당시 63억달러에서 10년 뒤엔 2백4억달러로 급성장했지요.

감성 바이러스의 사회가 만들어낸 '핫 소사이어티'에선 이렇게 '쿨(Cool)리더'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폭발적인 원자폭탄의 뇌관이 아니라 원자력 발전소처럼 감속제를 통해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자 말입니다. 스페인도 월드컵을 승화시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국민을 계몽하려고 해선 안돼요. 그리고 서둘러서도 안됩니다. 우리 안에 내재한 에너지, 엄청난 감성의 힘을 주목하면서 분명한 방향감각과 유연성을 가지고 진행시켜 나간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베스트 원'이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정리=고종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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