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영화 대유행은 폭력적 한국 현실 반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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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할리우드 영화를 벤치마킹한 영화 '쉬리'가 민족주의 정서를 등에 업고 신드롬을 불러온 상황은 어딘가 모순된 구석이 있다.

'쉬리'가 뜨기 전 한국 사회는 IMF 환란 위기의 파고를 지나며 더욱 철저히 미국을 모방하고 사회 전체가 미국화돼야 한다는 강박적인 교훈을 얻었다. 그렇다면 '쉬리'의 영화감독 강제규는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털어버리고, '세계적인 것=미국적인 것'이란 콤플렉스로 자리를 옮긴 것 아닐까. 여기에 "'쉬리'가 외화 '타이타닉'의 기록을 깰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호소가 공감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또다른 한국 영화 '엽기적인 그녀'. 남자 친구를 향해 "너 죽을래?"라고 위협하고 뺨까지 후려치는 당찬 '엽기적인 그녀'가 가부장제의 한국 사회에서 사랑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그녀의 엽기적인 행동은 죽은 애인을 잊기 위한 슬픈 몸부림으로 풀이된다. 이처럼 순결 이데올로기가 고수되고 있기에 그녀의 당참은 자연스럽게 용서될 수 있는 것이다.

1999년 개봉한 '쉬리'부터 '공동경비구역 JSA''유령''친구''엽기적인 그녀''조폭 마누라''공공의 적' 등 한국 영화 붐을 이뤄낸 '대박 영화'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사람은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겸임교수인 김경욱(39·사진)씨. 페미니스트로서의 시각을 견지하며 영화를 통해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있다. 여전히 모성만이 강조되는 여성, 군대 문화의 변주곡으로 다뤄지고 있는 조폭 세계 등을 예로 들며 '블록버스터 시대의 한국 영화는 (흥행작일수록 더욱)시대의 징후가 된다'는 전제를 증명해 보이고 있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영화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김씨는 "원래의 전공인 사회학을 벗어나기 힘든가 봅니다"라며 "저는 영화를 사회 현상과 아울러 설명하려고 하거든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좋은 조폭과 나쁜 조폭이라는 기이한 이분법을 발휘해 조폭을 순수한 인간 편에 놓아 버리는 모순, 가해자와 피해자, 사법과 불법의 차이가 무너져 버린 영화 속 상황 등이 부조리한 현실과 겹쳐진다.

한국 사회를 거울처럼 들여다 보게 해주는 영화 속 예들은 그밖에도 많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유독 남성들의 독무대였다.

그런데 남성 인물들은 남성성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자살을 하거나('공동경비구역 JSA''유령'), 아내를 살해하거나('해피엔드'), 친구를 죽이기도 한다('친구'). 그러나 이런 안티-히어로가 가부장제와 한국 사회 보수성에 칼날을 꽂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부 분열로 위기를 겪고 비관주의와 패배주의를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金씨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97년 이전의 홍콩영화를 닮아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부정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징후로 보인다"며 "'서로 잡아먹기를 탐내는 사회'같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폭력이 일상화된 조폭 영화가 대유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고 밝혔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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