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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환상문학 '소설은 유희'깨우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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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중남미 문학 전문가인 송병선씨(사진)가 지난 10여년간 보르헤스 문학을 연구하며 발표한 글을 모아 『보르헤스의 미로에 빠지기』(책이있는 마을)를 펴냈다. 보르헤스가 한국 문학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라는 관점을 기초로 해 쓰여졌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진 의미다.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보르헤스는 『픽션들』 『불한당들의 세계사』 『상상동물 이야기』 등의 작품을 통해 제임스 조이스·프란츠 카프카 등과 함께 20세기 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소설가로 평가된다. 게다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대한 보르헤스의 영향은 지대했다.

책은 보르헤스의 서사전략을 살펴보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백과사전을 이용한 글쓰기, 다른 작가들의 기존 작품을 의도적으로 잘못 읽은 뒤 패러디해 내는 방식, 사회현실에서 벗어난 서술의 힘만으로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그려내는 환상적 요소 등을 제시하고 있다.

송씨는 "보르헤스 문학은 소설의 진정성이 유희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며 "재미없는 수업시간에 낙서와 몽상이 탈출구이듯 소설의 유희란 현실의 탈출구다"라고 말했다. 그에 반해 "한국문학은 위대한 거짓말의 세계를 구축해 독자를 유혹하려는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서 보여지는 환상성이 우리 소설에 주요한 탈출구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논의들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송씨는 "몇 몇 친한 작가들이 환상성을 어떻게 구현해야할까 라고 물어온 적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작가들이 먼저 믿어야 한다는 것이죠. 꿈과 현실을 오간다고 해서 환상성이 구현되는 게 아니고요. 예컨대 마르케스의 경우 현실을 사실과 사람들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의 결합으로 파악하죠"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한국 소설을 외국어로 번역할 때 느낀 점을 예로 들었다. "이국적인 소재와 형용사와 부사로 꾸며진 아름다운 문장 속에 의미의 중복, 논리의 허점 등이 숨겨져 있어요. 국내의 독자에게 감동적일지 몰라도 세계 시장에서는 경쟁력을 상실하죠.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언어와 의미의 다양성을 만들 수 있는 서사구조가 더 중요한 때입니다."

그는 국내 작품 중에서는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환상성의 구현을 엿볼 수 있다고 했다. 1992년 콜롬비아에서 교수로 있을 때 세미나에 이 소설을 소개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다고 한다. 우화적인 필체에 사회현실을 다루면서도 열린 구조 속에서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외대 스페인어과를 졸업한 송씨는 콜롬비아에서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글=우상균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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