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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웍스 레이아웃 팀장 전용덕 ‘당신이 아티스트’ 카젠버그 칭찬 들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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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기선민 기자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2008년 개봉한 ‘쿵푸팬더’ 의 주인공 포.

그는 원래 ‘광고쟁이’였다. 서울시립대를 나와 금강기획에서 광고디자인을 했다. 천직인 줄 알았다. 모자람 없는 끼와 타고난 쾌활함 덕이었다. 회사 행사 때마다 사회를 도맡았다. 연말엔 ‘올해의 신입사원’에 뽑혔다. 스팸 한 박스가 상품이었다. 그러다 돌연 유학을 결심했다. 미술을 전공한 고교 때 단짝이 공부하러 간단 소식을 듣고 나서였다. “15년 후 제 모습이 확 보이는 것 같았어요. 대리·과장 거쳐 부장이나 되려나? 집도 못 살 텐데 싶으니 모험을 해보고 싶어지더군요.”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라’는 지도교수의 조언도 영향을 미쳤다.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SVA)에서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은 어렵지 않았다. 취업은 달랐다. 50여 군데 회사에 이력서를 보냈다. 모두 퇴짜였다. 외국인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어렵사리 시카고의 한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갔다. 2년이 채 안 돼 정리해고가 시작됐다. 결국 부도가 났다. 첫 아이가 태어난 지 2주가 지났을 때였다. 아이를 안고 엉엉 울었다. “디즈니처럼 유명한 회사에 취직해 금의환향하겠다는 제 꿈이 물거품이 될 지경이었죠.”

한 통의 e-메일이 그를 구했다. 1분30초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등으로 꾸민 ‘데모 릴(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는 작품)’을 본 드림웍스에서 연락이 왔다. “정크메일에 섞여 있던 그 메일을 읽지 못했다면 전 지금 드림웍스에서 일하고 있지 않겠죠. 지금 생각하면 운명 같아요.” 2003년 입사 후 ‘파더 오브 더 프라이드’ ‘헷지’ 등의 작품에서 레이아웃 아티스트로 일했다. 레이아웃은 실사영화로 치면 촬영에 해당한다. 화면 안에서 캐릭터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배경과 소품은 어떻게 배치할지 등을 컴퓨터상에서 가상카메라를 이용해 정하는 일이다.

입사 후 한동안 그는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는 직원 중 한 명이었다. “남들과 똑같이 하긴 싫었어요. 남들보다 무조건 많이 일했죠. 제 일 끝나면 남들 것도 달라고 해서 일했어요. 시키는 것 말고도 계속 아이디어를 냈죠. 샷(shot)을 10개 만들어오라고 하면 15개는 기본이었어요. 작업이 끝나면 팀장에게 보고하기 전에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인가’를 거듭 따져봤죠. 아니라고 여겨지면 고치고 또 고쳤어요.”

책임감과 집중력. 그가 꼽는 한국인의 강점이다. “아메리칸 스타일은 정해진 시간 안에 내 능력만큼만 하는 거죠. 코리안 스타일은 밤샘을 해서라도 기한 내에 고치고 또 고쳐 ‘물건’을 만들어 내요. 할리우드에서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그래픽 분야에서 한국인들이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도 이런 근성 때문일 거예요.”

끈기와 성실함이 거듭되자 승진은 자연스레 찾아왔다. 2005년 ‘쿵푸 팬더’가 기획될 무렵이었다. “드림웍스에선 팀장을 정할 때 감독과 프로듀서한테도 의견을 물어요. 같이 일할 사람이니 당연하게 여기죠. 나중에 들으니 저에 대해서도 감독·프로듀서는 물론 경력이 10년 이상 된 아티스트들한테 물어본 모양이더군요. 승진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승진 안 시키는 것도 이곳 특징이에요. 대신 팀장을 하고 싶으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사에 의사 표시하는 것도 중요하죠. 저도 얘기했어요. ‘대학 다닐 적에 과대표도 했으니 나도 팀장 할 수 있다’고요(웃음).” 이번엔 둘째 아이를 부둥켜안았다. 눈물 아닌 함박웃음과 함께.

‘쿵푸 팬더’는 국수가게집 아들 판다가 가업을 포기하고 쿵후를 배운다는 얘기다. 그에게 다량의 흰 머리를 선사한 작품이다. “몇천억원짜리 프로젝트였으니까요. 마음은 날아갈 듯했지만 어마어마한 스트레스 때문에 혓바늘이 절로 돋더군요.” 직접 쿵후를 배웠다. 컴퓨터상의 작업이지만 호랑이·원숭이·학·사마귀 등의 무술 동작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동물생체전문가를 불러 동물 관절 움직임도 익혔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드림웍스 CEO 제프리 카젠버그가 당시 그를 방으로 불러 “‘쿵푸 팬더’ 촬영은 내가 본 애니메이션 중 최고다. ‘아티스트’란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며 칭찬했다고 한다.

그에겐 남모를 사연이 있다. 왼쪽 눈이다. 올 초까지만 해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시각예술 분야 종사자로서 치명적일 수 있는 장애다. 하지만 그는 이 얘기를 하는 동안 계속 웃었다. 군 복무 시절 졸병의 빗자루에서 날아온 싸리나무 가지가 눈동자에 박히는 사고를 당했다. 몇 달에 걸쳐 수술을 네 번이나 받았다. 회복은 되지 않았다. “18년 가까이 입체가 잘 인식이 안 되는 상태로 살았어요. 올 초 도수 있는 수정체를 넣는 수술을 받았어요. 안경 쓰면 0.7까지 나올 정도로 좋아졌죠. 사실 ‘슈렉 포에버’를 3D로 만든다고 했을 때 좀 당황했어요. 야구공이 날아와도 잘 못 받았거든요. 회사에 사실대로 말을 할까 말까 무지 고민하다 결국 알리지 않았어요. 종이에 그리는 게 아니라 어차피 컴퓨터에서 하는 게 3D인데 큰 차이 없겠다 싶었거든요.”

유학을 가 미국에서 자리 잡고 싶어 하는 이들을 위해 조언 한마디 청했다. “제가 외국인이어서 힘들단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외국인이니까 더 열심히 하자란 다짐을 해본 적도 없고요. 인종차별이 있었다면 제가 팀장이 될 수 없었겠죠.” 언어 문제? “저도 디테일한 표현은 지금도 버벅대는 걸요.” 그럼 학벌일까. “여긴 고졸 출신도 많아요. 실력이 있으면 살아남아요. 그러려면 최선을 다하는 거죠. 최후의 순간, 한 점 후회가 없도록요.” 노력과 실력. 하긴 그것 말고 뭐가 있겠는가. 



칵테일 >> 드림웍스 사무실은 ‘놀이동산’

전용덕 팀장은 “만약 제프리 카젠버그가 드림웍스 CEO에서 물러난다면 드림웍스는 더 이상 지금의 드림웍스가 아닐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 정도로 카젠버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직원 2000여 명 대부분의 이름을 기억하는 건 기본이다. “입사한 지 넉 달 만에 내 이름을 불러 깜짝 놀랐다. 아니, 감격했다. ” 카젠버그의 진정한 리더십은 ‘사람’을 강조하는 철학에서 나오는 듯하다. “늘 ‘애니메이션은 고가의 장비로 만드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다, 재능(talent)이 제일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립서비스? 아니다. 드림웍스 분위기는 자유롭고 편안하다. ‘아티스트의 천국’이다. 사무실 공사를 하면서 소음이 일에 방해된다며 헤드폰을 나눠주거나 직원마다 자신만의 공간을 꾸미라고 200달러씩 지급하는 일은 작은 예다. 내가 회사의 부속품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출근할 때마다 놀이기구 없는 놀이동산에 가는 기분이랄까. 과장 아니다.(웃음)” 드림웍스는 올 초 포춘이 선정한 ‘일하기 좋은 직장 100’에서 6위를 차지했다. 구글이 4위였다.

>> 어, 한국 부채춤이 …

‘슈렉 포에버’에는 우리 전통춤인 부채춤이 쓰여 화제가 됐다. 오거(괴물)들이 슈렉과 피오나 공주를 가운데에 놓고 추는 군무 장면에서다. 한국인이 없었다면 쓰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 부채춤, 전용덕 팀장의 제안이었다. 지난해의 일이다. “무용수를 기용해 안무를 만든 후 그 안무를 애니메이션 만들 때 자료로 쓰기로 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선 처음 시도하는 거라 다들 관심이 대단했다. 괴물들의 무기를 정하는 회의에서 문득 부채춤 생각이 났다. 미국적인 느낌이 강한 ‘슈렉’에 우리 걸 넣으면 자랑스러울 것 같았다. 유튜브에서 부채춤 동영상을 찾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부채 를 방패로 바꾸면 된다고 설득했다.” 무용수들이 연습할 때 직접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스튜디오에 갔더니 11명의 무용수가 기차놀이 하듯 앞사람 등을 보면서 부채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었다.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채춤을 췄다.(웃음)” 돌이켜보니 ‘쿵푸 팬더’가 한국에서 개봉됐을 때 동물들의 무술에서 태권도 동작이 느껴진다는 반응이 있었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속 한국색,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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