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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5>제102화 고쟁이를란제리로: 14.안동 장작과 풍산 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너 학생 맞지?"

군인들이 따발총을 내 가슴에 들이대며 다그쳤다.

"저, 저, 저는 만주에서 오는 길인데요."

나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들어온 것은 1945년 11월 23일이다. 개성으로 가는 열차 표를 사러 가는데,공회당 앞 골목에서 따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거리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들이 골목으로 도망가자 북한 경비대 소속 군인들이 소련제 따발총을 갈겨댄 것이다.

그런 소란 속에서도 열차는 정상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20세였던 나는 열차 안에서 군인들의 검문을 받았다. 시위를 한 학생으로 오인받았던 것이다.

나는 만주에서 발행해준 증명서 덕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목격한 총격 장면은 신의주 학생사건이었다.

개성에서 서울까지는 차편이 없었다. 삼팔선이 가로막고 있었다.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를 생각한 나는 달구지를 빌렸다. 당시 농민들은 피란민들에게 돈을 받고 달구지를 빌려주곤 했다.

삼팔선을 달구지만으로 넘을 수는 없었다. 군인들의 경비가 그리 심하지는 않았지만 낮에는 숨어 지내야 했다. 밤을 기다렸다가 몰래 경계선을 넘었다. 삼팔선을 넘을 때 총성과 호루라기 소리가 요란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와 내가 서울에 들어온 것은 45년 12월 1일. 우리는 남대문 근처의 여관에 투숙했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나는 여관 골방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궁리를 거듭했다.그러는 사이에 날짜는 자꾸만 흘러갔다. 만주 땅에서 과자장사로 번 2만엔은 곶감 빼먹듯 잘도 없어졌다.

날이 갈수록 여관비가 부담이 됐다. 나는 생각다 못해 한옥 문간방을 사글세로 얻었다. 성북구 돈암동 한옥 골목에 있는 허름한 집이었다.

그리고 매일 동대문 시장에 나가 장사를 했다.난전에 기계를 펼쳐 놓고 하루 종일 고춧가루를 갈아 팔았다. 관절이 아팠다.

고춧가루 장사로는 돈을 모을 수가 없었다. 경북 안동으로 내려가 장작 장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동군 일직면에는 장작이 많았다. 장작을 화차 떼기로 사서 서울에 가져다 파는 일이었다.

가을에는 안동군 풍산에서 나는 무도 유명했다. 화차로 한차씩 서울로 실어 날랐다. 안동에서는 원주를 거쳐 청량리로 가는 중앙선 열차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석탄과 장작 등을 실어 나르는 화차가 밀려 보름도 넘게 걸렸다.

나는 꾀를 냈다.안동에서 영천을 거쳐 대구로 나갔다. 장작과 무를 서울로 나르기 위해 경부선을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에는 화차 배정권을 얻기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였다. 철도국 배차계에 찾아가 통사정을 해야만 했다. 화차가 출발해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중간역에 떼어놓고 다른 화차를 붙이기 일쑤였다. 직접 동승해서 챙겨야만 제대로 서울에 닿을 수 있었다.

당시에는 농산물 등을 다른 지역으로 가지고 나가 장사를 하려면 관공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물자가 모자라는 시절이다보니 그랬던 것 같다.

장작 반출권은 안동 군청에서 받아야 했다. 안동 군수로 있던 안경환씨는 나의 삼촌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삼촌은 군 서기로도 있었고 학교 선생도 했는데, 안씨와 친분이 두터웠다.

"장작 장사를 하고 싶습니다. 반출 허가권을 내 주십시오."

군수는 내 청을 선선히 들어 주었다. 삼촌의 덕을 톡톡히 보았던 셈이다.

나는 풍산 무를 반출하는 문제로 풍산 면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풍산 면장의 아들은 나중에 제일은행장을 지낸 송보영씨다. 풍산 면장도 내 청을 들어줬다.

한창 공부를 하고 있을 나이에 나는 장사에 눈을 뜨고 있었다. 몸으로 직접 부대끼며 장사를 배우는 현장 체험이 나의 공부였다.

정리=이종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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