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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史 위주 벗어나 다양한 잣대로 분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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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역사학계에서 방법론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다. 세계화가 진전됨에 따라 '세계 속의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역사학계는 주로 민족사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국가의 자주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내재적 발전의 가능성에 주목해 왔다. 그러나 이를 비판적으로 보는 세계의 시선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국가·민족사 중심의 역사학에서 벗어나 '작은 것을 통해 전체를 바라보는'미시사(微視史)나 일상의 변화에서 전체상을 읽어내는 생활사가 자리잡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이라 할 수 있는 이런 시도도 세계 역사학계의 영향관계 속에서 상호 이해가 가능한 역사학으로 전환하겠다는 생각과 무관치 않다.

경제사학계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소농 사회론'을 둘러싼 방법론 논쟁도 역사학계를 달구고 있다. 조선후기 사회가 자생적으로 근대화할 가능성이 없는 정체된 사회였다는 요지의 '소농 사회론'은 기존의 민족사학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방법론 문제는 이번주에만도 국사편찬위원회 국제학술회의·환태평양 한국학 국제학술회의·한국역사연구회 발표 등 3개의 학술행사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국제학술회의

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이성무)가 19일(수)~21일(금) 개최하는 '한국사의 연구방법과 방향'이라는 주제의 국제학술회의도 이같은 맥락에서 마련됐다. 1960년대 이후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온 역사학이 자료 연구에만 신경 쓰는 등 소재(素材)주의에 빠져 방법론 연구에 소홀했다는 반성에 따른 것이다.

이 학술회의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김자현(미 컬럼비아대)교수의 발표. 역사학에 포스트 모더니즘을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김교수는 국가·사회를 고정된 실체로 가정하고 그것을 실증적으로 입증하는 방법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나아가 김교수는 문헌의 불투명성을 예로 들어 역사적 문헌을 '역사화(historicize)'해 해석할 것을 주장하고, 다양한 견해가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 방법으로 '문화사학'을 제안한다. 서강대 백승종 교수도 국내 역사학계의 미시사 연구현황을 소개하며 유사한 문제 제기를 한다.

◇환태평양 한국학 국제학술회의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18일(화)~20일(목) 개최되는 환태평양 한국학 국제학술회의(조직위원장 신용하)에서도 방법론이 논의되고 있다. '한국생활사'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세션에서 정연식(서울여대)교수가 '최근 한국생활사 연구동향'을 발표해 같은 쟁점을 다룰 예정이고, 아울러 생활사와 관련된 노비 및 이민, 단군신화 등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 발표된다.

'한국문화의 세계화'라는 세션은 세계 속에서 한국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다룬다. 임돈희(동국대)교수가 한국 문화의 세계화에 대해 발표하는 것 외에도 무속, 인사동의 공간 정체성, 판소리 등 미시적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사가 다뤄진다. 호랑이 가죽·산(山)·춘향전 등을 주제로 다룰 '문화사'세션이나 페미니즘을 중점적으로 분석할 '식민후기 여성주의 전망'이라는 세션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 기획발표

한국역사연구회(회장 이영학)가 22일 오후 2시부터 대우학술진흥재단 8층 제2세미나실에서 개최하는 '조선후기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는 조선 후기 '소농사회론'을 둘러싼 토론이 벌어질 예정이다. 이는 현재 우리의 사회상에 대한 이해와 직접 연관된 것이어서 향후 뜨거운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역사학계는 조선후기의 사회가 정체돼 있었으며, 이런 조건에서 식민지 경험을 통해 근대화됐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데 역점을 둬왔다. 아울러 이들은 조선후기 사회는 중세봉건 사회가 해체되고 자본주의 맹아가 나타나 근대를 준비하는 역동적인 사회였다고 주장해왔다. 일제의 식민지는 이런 자주적 근대화를 왜곡하거나 압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반면 경제사학계 일각에서는 90년대부터 이같은 역사학계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조선후기에 자생적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은 없었으며, 서구 근대의 모방과 이식을 통해 한국사회가 근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역사상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농 사회론'이다.

여러 차례 논란을 벌였지만 뚜렷한 접점을 찾지 못한 이 두 주장이 이번에는 경제사학계를 대표하는 이영훈(성균관대·경제학)교수와 역사학계를 대변하는 최윤오(충북대·한국사)교수에 의해 각기 제시될 예정이나 결론에 이르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김창호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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