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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사람] 문화 외길 풍류객 김종규 박물관협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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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종규(65)한국박물관협회장의 고서(古書) 컬렉션은 20대 시절부터 몸에 밴 '고질병'이다. 당시 삼성출판사 사장으로 있던 맏형 김봉규(73)씨는 전무로 있는 동생이 봉급을 받아 헌 책 사는데 털어넣는 게 못마땅했다. 세배차 찾아뵌 문단 어른 박종화.김동리 영감에게 아우의 병을 하소연했다. "골칫거리입니다. 힘들게 새 책 팔아 기껏 헌 책을 사들이니…."

그게 1960년대의 일. '큰 사장' 봉규씨의 기대와는 달리 두 사람의 입에서는 칭찬이 쏟아졌다. "작은 사장, 멋진 일이야. 계속하시게." 당시 삼성출판사는 '김동리전집''황순원전집'과 함께 박경리 '토지'1부를 처음으로 펴냈던 명문 출판사였다.

"장형(長兄) 앞에 지금도 나는 벌벌 깁니다. 그러나 고서만은 그럴 수 없었지요. 박종화.김동리 영감은 이효상.유진오 어른과 함께 출판사 고문이셨으니 장형도 짐짓 눈감아주신 셈이고…."

그게 바로 김 회장이 주인으로 있는 서울 구기동 삼성출판박물관이 '초조본대방광불화엄경주본' 13권, '월인석보' 22.23권 등 국보.보물만 11권이 포함된 '전적(典籍) 1번지'가 된 첫 내력이다. 그런 그가 최근 '사고'를 쳤다. 지난 16일 일맥문화대상 수상금 2000만원 전액을 국립바그다드박물관에 기부한 것이다. "그곳 문화재는 이라크를 넘어 전세계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라는 게 쾌척 이유다.

김 회장은 현대미술.종교까지 아우르는 문화애호가다. 얼마 전 '나의 애장품전'에 시인 김후란 등과 함께 참여해 이당 김은호의 그림을 출품했는가 하면, 올 한해 '리움' 미술관 개관, 박생광 100주년전 등 수백개 문화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던 가장 바쁜 박물관.미술관 맨이다.

"문화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박물관대회(ICOM) 조직위원장을 맡아 아시아 처음이라는 행사를 막 끝낸 게 지난 10월 아닙니까? 지난 20일 종교박물관 설립을 주제로 한 심포지엄까지 마무리하고 나니 이제 겨우 연말이네요."

김 회장은 '문화'와 '배움'이 있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는다. 99년부터 맡아온 박물관협회 수장(首長) 외에 기층문화를 익히려는 민학회장(97년)을 지냈고, 문화재전문위원(91-99년).전통사찰 지정자문위원(2002년) 이력도 마음 부자의 문화 마인드를 가늠케 한다. 하지만 지인들에게 그는 무엇보다 '사람 사귀기 좋아하는 풍류객'이다.

"풍류? 실은 젊은 저에게 풍류를 알게 해준 분은 효당 어른이지요. 일제시대 김범부(김동리의 큰형).범산 김법린과 함께 '3범'으로 통했던 최범술 선생 말이오. 사학자 천관우.홍이섭 선생 등이 끔찍하게 모셨던 어른이기도 하고오."

김 회장은 나이를 떠난 친교에도 능해 스무살 연상의 시인 구상과 의형제를 맺어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기억력도 남달라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 관련 일화 등 문화계의 뒷얘기를 복원해 주는 '백과사전'이기도 하다.

"95년 4월 백남준 선생을, 그가 '우리 어령이'라며 무척이나 아끼는 이어령 전 장관과 함께 출판박물관에 모셨지요. 그때 백 선생이 전시돼 있는 고하 송진우의 사진을 보더니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부친의 '과거사'를 툭 털어놓는 거예요. 일제시대 친일파였던 그의 아버지가 뒤가 켕겼는지 정계 거물 고하에게 최고급 세단을 상납했다는 거죠. 속으로 '아하, 이 분 진짜 예술가로구나'하고 감탄했지요."

문득 그에게 찔러 물었다. "개발세대 한복판의 옛날 분이 하필 돈 안되는 문화 쪽에 눈을 돌렸느냐"고-. 돌아온 대답이 문화계 대부다웠다. "아, 예술이 뭡니까? 인간으로 신의 영역을 가까이 하는 최고의 영역이 아니던가요? 그런 예술가를 만나는 통로가 미술관.박물관.출판사이고…. 그 세 가지 통로를 두루 다 해본 삶인데, 정치.경제가 뭐 부럽겠어요?"

글=조우석 문화전문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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