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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승자를 꿈꾸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누구나 사람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앨범 속 사진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빛이 바래고 기억 또한 가물가물해지지만 가슴으로 찍은 마음의 사진은 두고두고 머리에 또렷하게 남는다. 슬픔이나 기쁨일 수 있고, 놀라움이나 두려움일 수 있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그 순간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나곤 한다.

붉은인파 담은 마음의 사진

1998년 7월 12일 밤의 파리 샹젤리제 거리는 내게 잊혀지지 않는 마음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의 국가대표팀 '레 블뢰'가 월드컵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3-0으로 완파하고 우승을 차지하던 그 밤, 샹젤리제에는 1백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그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며 승리를 환호했다. 사람들마다 손에 빨강·파랑·하양으로 된 삼색기를 들고, "오나가녜(우리는 이겼다)"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개선문에는 지단·앙리·트레제게·프티·드자이… 등 프랑스를 승리로 이끈 삼색전사들의 얼굴이 하나씩 레이저 영상으로 비춰졌고, 그 때마다 사람들은 '영웅'들의 이름을 연호했다. 어디선가 그룹 퀸의 노래 '위 아 더 챔피언스(우리는 챔피언이다)'가 흘러나왔고, 사람들은 노래에 맞춰 어깨동무를 하고 몸을 흔들었다. 발디딜 틈 없는 인파 속에 묻혀 있던 내게 떠오른 단어는 열정·희열·흥분·에너지·통합·애국심 같은 것들이었다.

미국과의 월드컵 경기가 있던 지난 10일 서울 광화문과 시청 앞에 모인 수십만 인파를 바라보면서 같은 감동과 격정에 휩싸였다. 쏟아지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한민국"과 "필승 코리아"를 외쳐대는 붉은 인파는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사진으로 남을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새벽부터 나와 한 몸, 한 마음으로 한국팀을 응원했다. 한국팀 경기 입장권을 사기 위해 매표소 앞에서 수천명이 2박3일동안 줄을 서게 한 그 열정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상업주의와 애국주의의 절묘한 결합이 월드컵이다. 고대로마 원형경기장의 현대판이 월드컵 경기장이고, TV와 전광판은 안방과 거리에 수백만·수천만개의 원형경기장을 만들어낸다. 국가와 국기라는 월드컵의 상징조작을 통해 사람들은 현실세계의 정치·경제적 파워가 역전되는 감동과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그런 줄 알면서도 조국의 명예를 걸고, 그라운드에서 혼신을 불사르는 선수들에게서 짜릿한 전율과 감동, 아름다움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프랑스가 덴마크에 0-2로 패해 조 최하위의 성적으로 16강에서 탈락한 다음날 프랑스의 르몽드지에는 '환상의 끝'이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프랑스 축구의 거품을 빼는 데 이번 패배는 기여했다"면서 "프랑스팀의 패배는 금전의 추구는 결국 파산이고, 교만은 동기유발의 가장 큰 적이며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논평했다.

이미 멋진 월드컵이 됐는데

프랑스의 로제 르메르 감독은 "프랑스팀이 없어도 이번 월드컵은 멋진 대회가 될 것"이라고 우아하게 말했지만 미안하게도 프랑스팀이 탈락함으로써 이번 대회는 이미 멋진 대회가 됐다. 파리로 돌아간 프랑스 대표팀을 공항에서 맞은 수백명의 열성팬들은 환상이 깨진 아픔에도 불구하고 야유의 휘파람을 불지도, 토마토를 던지지도 않았다.

우리의 저력을 확인시키고, 우리에게 카타르시스의 기회를 제공한 것만으로 이미 거스 히딩크 감독과 한국대표팀 선수들은 찬사를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이 있다. 오늘 저녁 포르투갈과의 경기결과에 관계없이 그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이번 대회의 진정한 승자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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