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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의 획일성 비판 '판타스틱 소녀백서' "나는 잘난 남자는 싫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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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9면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단 두시간 동안만이라도 팬터지를 맛보고 싶어한다.

그래서 종종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 영화들은 대중의 지지보다는 평단의 박수 아래 고독한 선지자의 길을 걷게 마련이다.

'판타스틱 소녀백서'는 이들보다 결코 덜 진지하지 않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법에서 매우 영악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 수작이다.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내뱉으면서도 좀처럼 설교를 하려 들지 않는다. 신랄하기 짝이 없지만 결코 경쾌함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조화로움은 네티즌과 평단의 고른 열광에서 잘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인터넷 무비 데이터베이스(IMDB)에서 8.1(10점 만점)이라는 놀라운 평점을 받았고, 유명 영화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www.rottentomatoes.com)에서 신선도 94%(1백% 만점)를 받아 지난해 발표된 영화 중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원작으로 삼은 대니얼 클라우스의 인기 만화 '고스트 월드'의 발랄한 만화적 상상력과 테리 지고프 감독의 맵디 매운 현대 사회 비판이 절묘하게 어우러졌다는 평이다.

영화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며 절대로 이뤄질 것 같지 않은 커플의 로맨스를 천천히 따라간다. 열여덟살 소녀 이니드(도라 버치)와 40대 노총각 시모어(스티브 부세미)가 그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은 이 사회의 명백한 '비주류'다. 커다란 검은 뿔테 안경에 1970년대 펑크 록을 흉내낸 기묘한 옷차림을 즐기는 이니드는 고교 졸업 후 취직할 생각도, 결혼할 욕심도 없는 '떠도는 10대'다.

시모어는 심하게 말하면 사회 부적응자다. 시대에 뒤떨어진 78회전 레코드를 수집하며 그것을 은근히 자랑으로 삼는 그는 허리가 시원찮아 늘 복대를 하고 다닌다. 뻐드렁니에 두꺼비같은 눈을 지닌 그가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 시모어가 신문에 낸 애인찾기 광고를 보고 그를 스토킹하기 시작한 이니드는 엉뚱하게도 이 '엽기남'에게 사랑을 느낀다. 이유는 단 하나. "그는 모든 점에서 내가 싫어하는 것들과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95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지고프 감독은 이들의 연애담을 몸통으로 삼고 주변 인물들의 일상을 곁가지로 쳐나가면서 소비 일변도로 획일화한 현대 사회를 잘근잘근 씹는다.

'편리=아름다움'이라는 우리 시대의 미덕은 시대착오적인 인물인 시모어에 대한 소녀의 열광을 통해 차츰 허물어진다.

역설적이게도 이 '복고'의 첨병은 '꽂히는 대로' 움직이는, 그래서 흔히 기성세대들의 관점에서 '도무지 뭘 생각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10대들이다. 이는 1920~50년대 블루스 음악을 끊임없이 울려대는 '판타스틱 소녀백서'를 단순히 '복고'를 영화적 장치로 채용한 여타의 영화들과 구별짓는다.15세 이상 관람가. 오는 21일 개봉.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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