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국-미국전을보고>을용아, 기현아 힘내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을용아, 그리고 기현아.

이 선배는 여러번의 득점 기회를 놓친 기현이의 모습에 실망하지 않았다. 을용이 네가 페널티킥을 골로 연결시키지 못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땐 그저 같이 울어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건 나만이 아니라 온국민의 마음이었다. 너희도 보았을 것이다. 대구경기장을 가득 메운 붉은 티셔츠의 물결을-. 그것은 단순히 승리에 대한 염원만이 아니었다. 배고프고 힘들게 살아 왔지만 그 열악한 조건을 딛고 여기까지 온 우리 대한민국 국민 자신에 대한 격려와 환호였다.

기현아, 그리고 을용아.

다른 사람들은 월드컵 대표팀의 베스트 멤버인 너희를 이을용 선수와 설기현 선수라 부르지만,나는 강릉일고(옛 강릉상고)선배라는 점에서 을용이와 기현이라고 부른다.

어제 아침 지방 일간지에 실린 모교 총동창회의 축하광고에 을용이의 별명은 '감자'와 '인민군'이고,기현이의 별명은 '설바우두(한국의 히바우두)'라 적혀 있었다. 그러한 후배의 프로필을 유쾌한 마음으로 읽으면서 참으로 장하다는 생각에 목이 메었다.

어제는 전국민이 경기장과 도로를 메우고, 텔레비전 앞에 몰려 우리팀을 응원하였다. 나 또한 한국팀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너희의 분전을 지켜보기 위해 아침부터 조바심했다. 나는 고향인 강원도 동해시에서 시의원에 출마한 동생의 선거운동원들과 어울려 경기를 관전했다.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이을용과 설기현 선수가 내 고교 후배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또 자랑했다.

너희가 경기장을 종횡무진 누비는 모습은 실로 나만이 아니라 온국민의 자랑이었다. 뛰어난 체력과 끈질긴 승부 근성이야말로 강원도 촌놈인 너희가 세계적인 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었던 자질의 일차적 조건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점을 사랑한다. 신체조건이 유리한 서양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물러서지 않고,볼에 대한 집착에서도 뒤지지 않는 게 감탄스러웠다.

전반전 초반에 황선홍·유상철·이천수 선수 가운데 어떤 선수가 선취점을 올릴 것인가를 묻는 시청자 퀴즈의 자막을 보면서도,나는 반드시 을용이와 기현이가 선취점을 터뜨릴 거라고 호언장담했다.나는 나의 이러한 이기심을 즐겁게 허락했다.

그러나 이제 이기적인 응원과 환호를 마치면서 후배인 너희에게 한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 운동경기만이 아니라 인생과 세상사에도 요행수나 우연은 없다는 사실이다.

킥을 하든, 헤딩을 하든 내 신체를 떠난 볼이 상대방 골네트에 꽂힐 때까지 시선을 비켜서는 안된다.눈을 감아서도 안된다.골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물리적 정교함의 결실이다.

이는 을용이의 페널티킥 실패에 대한 생각만이 아니다. 십여차례나 거듭된 코너킥을 지켜보면서 우리 관중은 정교한 세트 플레이나 확실한 구상도 없이 문전으로 볼을 차올리기만 하는 모양에 탄식을 자아냈다.

결과적으로 후반전 안정환 선수의 헤딩슛으로 비기기는 했지만, 미국팀에 비해 월등한 투지와 기량을 과시하고도 승리하지 못한 이유는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감아서는 안된다'는 삶의 진리를 깊이 새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을용아, 그리고 기현아.

자랑스러운 후배들아.너희의 선전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마음을 편히 가져라. 나와 우리 국민 모두는 너희를 사랑한다.너희의 실축과 수비 실수와 헛발질마저 사랑한다. 그러니 부담은 갖지 마라. 더구나 최선을 다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

을용아, 기현아. 힘내라!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