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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두살 '文學 소녀':소설가 꿈꾸는 소설가 성석제의 어머니 채 병 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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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하던 아들은 장성해 인기 소설가가 됐다. 아들의 소설을 한편도 빼놓지 않고 읽던 어머니는 칠순의 나이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마음 속의 아름다운 진실을 술술술 풀어내는 아들처럼 어머니도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소설가 성석제(42)씨의 어머니 채병순(72)씨의 얘기다. 성씨는 『재미나는 인생』『홀림』『순정』 등의 소설을 통해 이야기의 마술사요, 40대 소설가 중 선두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석제는 어릴 때부터 유별났어요. 밖에 나가 놀지는 않고 늘 책만 봤으니까요. 특히 만화책을 아주 좋아했죠. 대본소에서 새 책이 나오는 족족 달려갔어요."

검정고시로 중고등 과정 마쳐

성석제씨의 누이들에게는 종종 이솝우화도 들려주곤 했지만 소설가 아들은 어린시절부터 어머니가 아는 얘기보다 더 많은 것들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총명한 아들은 어머니의 자랑이자 본받고 싶은 대상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내 아들이니까 작품이야 다 좋죠. 저는 특히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를 좋아해요. 특히 젊은 사람들은 아들 작품을 너무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아들의 문학에 빠져 있던 어머니가 작심하고 창작의 길로 들어선 건 2000년 숭의여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하면서다. 입학 전 2년 동안 중등·고등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수능시험까지 볼 정도로 열심히 달려왔다. 그 이전까지 채씨의 정규 학력은 고향인 경북 상주에서 일제시대 때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였다.

올해엔 숭의여대를 졸업한 뒤 내친김에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 전문가 과정에 다니며 소설가의 길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런데 습작품 품평회를 하고, 많은 소설 리포트를 쓰는 동안 프로 작가인 아들과 상의하거나 그에게서 도움을 받은 적은 없다.

"'성석제 엄마가 소설 쓴다.' 이런 얘기에 우리 아들이 부담스러워 할까봐서죠. 직접 써보니까 글쓰기가 한편으론 얼마나 고통스런 일인지 확실히 알게 됐어요. 아들을 더 이해하게 됐고요. 왜 그렇게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지를. 글쓰기에 대해선 아들하고 일절 얘기하지 않아요. 아들이 손을 대려고 하면 끝이 없을 것 아니겠어요. 게다가 내 글이 잘 돼서 만약 등단했다 쳐봐요. 아들이 한번이라도 도와준 사실이 있으면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볼 것 아니겠어요."

그저 듬직한 아들이 진심으로 성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게 없었다.

또한 유랑극단의 변사가 한판 장광설을 풀어놓듯 이야기를 만들어 내던 아들의 입은 어머니 앞에서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아들의 진심도 어머니 못지않았다. 뒤늦게 당신의 길을 찾아가는 어머니가 혹시 뜻을 펼치기도 전에 아들 이름에 눌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작품 얘기는 하지 않는 게 무언의 약속이 됐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늦깎이 대학생활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머니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의 캠퍼스에선 봄처녀가 된 기분에 괜히 마음이 울렁거리기도 했다. 리포트 제출, 시·소설 습작, 작품 합평회 어느 것 하나 게을리하지 않았다. 일단 재미가 있으니까, 또 알아간다는 새로움에 환히 눈뜨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대학 동기들이 할머니라고 부르건, 때로 언니, 가끔은 짓궂게 엄마라고 부르건 상관없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에 분식집에 몰려가 먹는 라면 맛도 기가 막혔다.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에는 처음으로 컴퓨터 앞에도 앉았다. 이 신종 기계야말로 검정고시 준비 때 골치를 썩였던 수학보다 더 어려웠다. 처음엔 마우스에 손만 대도 화살표가 제멋대로 이리 튀고 저리 튀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워드 프로세서는 자유자재로 쓸 수 있고 어린 대학 동기들에게 e-메일도 수시로 보낼 수 있게 됐다.

"공부한다고 하니까 주위 친구들이 '그거 뭐하러 하냐. 같이 놀러나 다니고 맛있는 거나 먹자'라고 해요. 그 사람들 말이 한편으로 옳은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아니에요. 책을 보고 글을 쓰면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니까."

문학에 대한 채씨의 관심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북 상주의 벽촌에 위치해 있었지만 집에는 손 닿을 곳에 항상 책이 있었다. 특히 어머니께서 궤짝 한 가득 담겨진 언문 소설을 꺼내 겨울밤 잠 못드는 자신에게 읽어주곤 했던 일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내친김에 대학·대학원까지

『삼국지』는 하도 많이 들어 이제는 외울 정도고 『사씨남정기』『구운몽』 등의 우리 고전도 낭랑한 어머니의 음성으로 듣고 또 들었다.

"큰오빠도 그 영향을 받았는지 지금도 한시를 쓰고 있지요. 당시 여자는 보통학교만 졸업하면 된다는 분위기였어요. 중학교에는 안 보냈지만 책은 가까이 두고 봐야 한다고 했어요. 동네에서 흔한 일은 아니었고 반가(班家)에나 있는 일이지요."

시집가기 전까지 『흙』『유정』『무정』 등의 소설을 빼놓지 않고 읽었다. 스무살 되던 해인 1950년에 결혼해 아들 셋, 딸 셋을 내리 낳고 농사일을 하면서 책과의 거리는 조금 멀어졌다. 1973년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보험 모집 등 각종 부업에 재봉틀을 돌리며 하루에 도시락 여덟개를 넘게 싸던 억척스런 어머니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어머니, 혹은 그 이전의 가계(家系)에서부터 문학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직 등단작가는 아니지만 문재(文才)의 유전인자로는 어머니가 당연히 아들보다 앞선다.

군에서 죽은 아들얘기 쓸 터

한국 문단의 주요 문인들 사이에 가계도(家系圖)를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술가의 피가 후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소설가 황순원·시인 황동규 부자, 소설가 한승원·한강 부녀에서 김원일·김원우 형제와 김채원·김지원 자매에 이르기까지.

채씨는 사실, 등단해 소설가 소리 들어보겠다는 마음보다는 털어놓지 못한 속내, 살면서 켜켜이 쌓인 아픈 기억 같은 것을 글로 풀어낼 때 느껴지는 짜릿한 기분에 더 끌리는 듯했다.

자기 치유로서의 글쓰기. 체한 듯 가슴께에 꽉 막힌 통증을 주던 것들에 관해 한 줄 한 줄 써나가다 보면 속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라고 했다. 채씨의 맺힌 마음은 그 세대 모두가 짊어져야 했을, 탈 많고 말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비롯됐다.

꼭 한번 소설로 쓰고 싶은 소재는 두가지라고 했다. 하나는 좌익 전력자에게 개전의 기회를 주겠다는 명목은 사라지고 대량 학살로 이어졌던 보도연맹 사건. 그리고 또 하나는 유신시대 공부 잘하는 멋쟁이 대학생 큰아들이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던 일이다.

"따지고 보면 다 분단 때문에 생긴 비극이에요. 보도연맹 사건 때 고향 상주에서 남자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죠. 우리 동네는 집성촌이라 채씨들이 많았는데 우리 면에서만 채씨 청년 80명이 죽었어요. 그때 지서장이 '내일은 먼 길 갈테니까 신발 단단히 신고 와라'고 넌지시 알려줬는데 그 뜻을 알아채지 못한 순진한 사람들만 죽어나갔어요. 그리고 우리 큰아들 일도 생각하면 참…. 그때 대학생들이 입소하면 제일 험악한 데다 배치하고 그런 시대였는데, 나는 어떻게든 그 이유는 좀 밝혀내고 싶어요."

채씨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고, 동갑내기인 소설가 박완서씨도 나이 마흔에 작가생활을 시작하면서 "전쟁에 한이 맺혀서, 마음 속에 풀어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글을 쓰게 됐다"고 하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한국전쟁과 발작적인 근대화를 남김없이 체험한 그 세대에서 소설가의 기질을 갖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식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라는 신념을 하나의 종교처럼 가지고 참고 또 참으며 살던 어머니들. 그러니 또한 글이 아니면 어떠랴, 그분들이 살아온 인생이 문자를 넘어서고 있는데.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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