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안의 평화를 만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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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국내 독서시장에도 막강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구촌의 종교 지도자 두 분이 있다.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베트남 출신의 틱낫한 스님이 그들이다. 이들과 관련한 저술들이 최근 몇년새 각기 10~20종이 쏟아지며 독자들과 폭넓게 만나고 있다. 이들의 관련 저술은 서구에서 출판상품으로 개발된 뒤 국내로 수입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점에서 포괄적으로 보자면 새로운 영성(靈性)을 모색하는 지구촌의 문명사적 흐름과 무관치 않다.

우선 두 사람은 충분한 도덕적 위엄을 갖췄다. 티베트 망명정부의 정신적 스승(달라이 라마), 평화운동가이자 난민공동체의 지도자(틱낫한 스님)라는 각자의 특징이 그것을 말해준다. 여기에 두 분은 간결한 언어를 무기로 주로 유럽과 미국의 엘리트층과 젊은 세대들에게 구루(영적 스승)로 떠오른 지 오래다.

틱 스님의 새 저술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의 경우 이런 흐름을 타고 나온 기획상품이다. 지난해 말 이후 76쇄를 찍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에 이어 같은 출판사가 한묶음의 책을 만들기 위해 펴냈다. 최근 몇년새 개신교 이현주 목사, 종교학자 오강남 박사 등이 훌륭하게 만든 번역본이 이미 10여종이 나와 소수 독자들에게 알려진 상황에서 틱 스님 저술의 중간결산을 겸한 대중용 버전으로 만든 책이 이 신간이다.

편집방식이 흥미롭다. 이 신간은 '한국의 뉴에이지 저술가'로 이름붙일 만한 류시화가 편집작업에 깊숙이 참여했다. 틱 스님의 허락을 받아 그의 저술 20여권과 편지 등에서 11개의 토픽을 추려내 우리 말로 옮겨내는 방식이다. 주요 장절은 이런 식이다. '내 마음 속의 은자' '지금 이 순간이 경이로운 순간' '마음의 씨앗을 심는 법'…. 제목에서 가늠되듯 『마음에는 평화,얼굴에는 미소』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의 방식으로 포장한 틱 스님'이라고 보면 된다.

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번역서 『티벳 사자의 서』등 45종 내외의 단행본 총 판매량(1천만권 추산)에서 보듯 '언더그라운드 출판권력'인 류시화의 번역은 매끄럽다. 그의 매끄런 가이드가 보여주는 틱 스님 '법(法)의 말씀'은 속삭이듯 독자들의 귓전에 앉는다. 설교하려들거나 난삽한 개념 구사가 없기 때문이다. 논리에 익숙하거나, 아니면 즉각 사용가능한 마음의 처방 매뉴얼을 기대했던 성미 급한 사람들이라면 당혹감을 가질 법도 하다.

이 책과 제대로 만나려면 일종의 무장해제가 필요할 듯싶다. 불교식으로 말해 어지러운 마음을 내려놓는 방하착(放下着) 말이다. 그래야 책에서 반복되는 "지금 이 순간의 경이로움을 살아라"는 메세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른다. "나 자신도 마음의 평화와 미소가 필요할 때면 틱 스님의 글을 읽는다"(11쪽)고 고백한 달라이 라마의 찬사를 함께 곁들여도 좋을 듯싶다.

"인간의 마음은 원숭이와도 같다. 쉬지 않고 움직이면서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지만 결코 발견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우리 안의 원숭이를 껴안고 쉬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그대가 매화마을(틱 스님이 운영하는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선방(禪房) 이름)에 온 목적은 그 대안의 소란스런 원숭이를 껴안기 위함이다. 숨을 쉬면서 두 걸음을 걸으며, 그대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나는 이미 도착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명상법이다."(42쪽 요약)

따라서 이 책은 요즘 몇년새 독서시장의 트렌드인 느림 예찬과도 무관치 않다. 모더니즘 도회지 문화에 지친 마음을 쓸어주는 위무(慰撫)효과 말이다. 문제는 바로 그 때문이다. 이번 책이 종교간 관용(寬容)을 말하는 틱 스님의 또 다른 면목을 전하는 데는 다소 미흡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귀향』(모색, 2001)에서 보이는 종교간 평화 메시지는 이 책에서는 거의 비춰지지 않는다.

"불교는 기독교의 일종이요, 기독교는 불교의 일종이라는 생각은 온당치 못합니다. 망고가 오렌지일 수 없고, 오렌지가 망고일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다른 종류의 과일입니다. 이런 다름은 좋은 일이고 '다름 만세'입니다. 그러나 이 둘을 더 깊이 들여다 보면 둘 다 햇빛·구름·단맛 등 같은 성분을 갖고 있습니다."(『귀향』31쪽) 『마음에는 평화, 얼굴에는 미소』가 나온 이 기회에 종교간 공존에 관한 성찰을 따로 묶은 버전이 나오길 기대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설탕옷(糖衣)을 씌운 마음 위안 상품'을 넘어 틱 스님을 제대로 만나게 하는 길일 것이다.

조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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