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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11. 대림산업 이준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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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196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림산업 이준용 회장(右)과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中).

절친한 친구 중에 대림산업 이준용(67) 대표가 있다. 35년 지기(知己)로, 지금은 반말로 농도 하는 허물없는 사이지만 처음 만났을 때는 인생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의 가족이 운영하던 대림산업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의 후반기는 수많은 좌절로 점철됐을 것이다.

1968년 1월 21일 북한에서 남파한 무장간첩 일당이 청와대를 공격하려다 김신조만 생포되고 모두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1.21사태'. 온나라에 비상이 걸렸지만 '태흥상공' 이라는 건설회사를 운영하던 내게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됐다. 사건 직후 미국이 군사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에 1억달러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1억달러라면 당시 한국의 총 수출액에 맞먹을 만큼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미국 정부는 한국 건설업체의 경우 미국 건설사와 합작해야 시설 공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을 달았다. 적어도 수익의 절반은 미국 기업이 되가져가도록 한 것이다.

아무튼 공사를 따내려고 동분서주했다. 웬만한 공사는 집권당인 공화당에서 건설업자를 지정하고 대신 정치자금 명목으로 커미션을 챙기던 시절이었다. 공화당 재경위원장을 찾아가 로비한 끝에 136만달러짜리 공사를 따냈다. 10만달러 안팎의 공사만 해오던 나는 급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규모가 작은 우리 회사와 합작하려는 미국 건설사가 한 곳도 없었다. 약 3000만원의 정치자금은 이미 공화당 재경위원장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공사비 1달러에 20원씩을 정치자금으로 떼는 게 당시 관행이었다. 공사를 못 따냈다고 돌려받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입찰이 무산되면 그대로 주저앉을 판이었다.

그때 우리 회사의 부사장이 대림산업 이준원(이준용씨의 형) 상무를 나와 연결해 주었다. 대림은 미국 6위의 건설업체인 MK와 합작해 1000만달러 공사를 수주해놓은 상태였다. 대림이 우리 회사를 보증 서고 MK와 연결만 되면 입찰은 성사되는 것이었다.

대림을 찾아갔더니 이준용씨가 맞아주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막 돌아온 그는 외사(外事)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모든 이익을 다 내놓겠다. 들어간 비용만 뽑으면 된다. 도와 달라"며 통사정을 했다. 전화로 답을 주겠다고 했다. 며칠간 느꼈던 초조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해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냥 지원하겠습니다." 귀를 의심했다. 1만5000달러가량의 세금까지 자기네 비용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MK를 연결해 주는 것만도 감지덕지인데…, 홀린 것 같았다.

어찌나 고맙던지 어떻게든 사례하고 싶었던 나는 며칠 뒤 300만원이 든 봉투를 넣고 이 과장을 찾아갔다. 슬며시 책상에 봉투를 놓고 나오려는데 그가 불렀다. "그거 뭡니까" "아, 아니 그냥 용돈이나 하시라고…" 말을 채 맺기도 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옆방의 직원을 고함치듯 불렀다. "야! 이 사람 당장 끌어내!" 너무 민망해 쫓겨나다시피 물러났다.

이틀 뒤 일식집으로 그를 불러냈다. "사과하러 왔시다. 결례를 했소이다." 그는 내 말을 듣더니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렇게 안 받으시겠다니 그럼 이 돈으로 우리 술이나 마십시다." 그렇게 우리는 그날 밤 '친구'가 됐다. 하지만 그 300만원은 이후로도 쓸 기회가 없었다. 가는 술자리마다 그가 계산했으니까. 그리고 대림이 왜 나한테 조건없이 지원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오늘까지 듣지 못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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