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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제2부 薔薇戰爭" 제4장 捲土重來 : 어찌 명문가와 혼사를 하겠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과연 김양의 표현대로 장보고와 김우징 가문간에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용은 승천하게 되었으며, 봉황은 하늘을 날게 되었음일까. 그러나 결국 이 혼인은 장보고에게 치명적인 비극을 제공하는 원인이 되는 셈이니-.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고, 어쨌든 김양으로부터 청혼의 용봉예서를 받은 장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어 말하였다.

"이것이 무엇이나이까."

그러자 김양은 웃으며 말하였다.

"한번 펼쳐보시옵소서."

장보고는 빨간 끈으로 매어놓은 접지를 펼쳐보았다. 빨간 끈은 적승이라 하여서 흔히 남녀의 혼인을 주관하는 전설 속의 월하노인이 갖고 다니던 인연의 끈을 의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용봉예서가 아닐 것인가."

장보고가 크게 놀라며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대사 나으리. 아찬께오서는 대사 나으리의 따님과 아찬 나으리의 아드님과의 혼인을 간절히 원하시고 계시나이다. 바라옵건대 대사 나으리께오서는 이 상서로운 청혼을 부디 물리치지 마시옵소서."

장보고는 김양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의 신라 계급사회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귀족들은 씨족중심의 외혼제(外婚制)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신분제인 골품제(骨品制)로 성골과 진골이 아니고는 왕족이 될 수 없었던 왕족 중심의 귀족국가에서 대대로 명문 중의 명문이었던 김우징의 가문이 청혼을 해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일이었던 것이었다.

"하오나 대장군."

장보고는 김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하였다.

"나는 바다에서 태어난 해도인으로 매우 미천한 사람이오. 그런데 어찌 감히 진골 출신의 명문가와 혼사를 맺을 수 있겠소이까."

장보고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기에는 장보고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문성왕(文聖王)7년 3월.

왕이 청해진대사 궁복의 딸을 취하여 차비로 삼으려 함에 여러 군신들이 간하여 말하기를 부부의 도리는 인간의 큰 윤리다. 그러므로 하(夏)나라의 왕 우(寓)는 부인이었던 도산(塗山)으로 인해 일어나고 은(殷)나라의 왕 탕(湯)은 부인이었던 유화(有華)씨로 인하여 창성하였다. 그러나 주(周)나라는 포사(褒?)로 망하고, 진(晋)은 여희(姬)로 문란하였다. 나라의 전망이 여인에 있으니 어찌 삼갈 일이 아닌가. 지금 궁복은 해도인(海島人)으로 어찌 그 딸로 왕실에 배우를 삼을까보냐고 극간하니, 왕이 그 말에 청종하였다.'

장보고를 해도인, 즉 섬사람이라고 멸시하였던 신라의 귀족들은 다만 이에 그치지 아니한다.『삼국유사』에서는 장보고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신하가 극간하여 가로되 궁파는 매우 측미(側微)한 사람이니, 그의 딸로 왕비를 삼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사서에 기록된대로 해도인 출신으로 매우 측미한 계급의 천민이었던 장보고로서는 감히 김우징의 청혼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김양이 나서서 말하였다.

"아찬께오서는 대사 나으리의 병력에 의지하여 임금과 애비의 원수를 갚으려 하시나이다. 대사 나으리가 아니시오면 어찌 감히 임금과 애비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겠나이까. 지금 대사께오서 미천한 신분으로서 어찌 귀족과 혼사를 맺을 수 있을까하고 탄식하셨으나 옛말에 이르기를 '가녀수승오가(嫁女須勝吾家)'라 하였나이다. 즉 딸을 출가시킴에는 재산과 명망이 자기보다 월등한 집을 선택하여야만 부도(婦道)를 다할 수 있다는 뜻이나이다. 부디 대사 나으리께오서는 아찬께오서 보내신 붉은 끈을 받아들이시어 적승계족하시오소서."

적승계족(赤繩繫足).

붉은 끈으로 발을 묶는다는 뜻으로 혼인을 결정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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