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바로 이맛-고마워요 히딩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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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거스 히딩크 감독.선수로서는 보잘 것 없었지만 감독으로서는 역시 세계적인 명장이었다.

그는 불과 1년5개월 만에 한국팀을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강팀으로 조련했다.

1946년 11월 8일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축구에 입문, PSV 아인트호벤 등 네덜란드 프로팀과 북미축구리그(NASL)워싱턴 디플로메츠 등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대표팀과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는 79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83년 아인트호벤 코치로 들어간 히딩크 감독은 입단 3년 만인 86년에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88년 국내 리그컵 우승과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을 따내며 감독으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94년 네덜란드 대표팀 감독에 취임,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4강까지 올려놓았다. 그해 말 스페인 레알 마드리드 감독에 부임한 그는 유럽과 남미의 프로클럽 최강자를 가리는 도요타컵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한국이 히딩크 감독을 처음 접한 것은 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다. 당시 차범근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그가 이끄는 네덜란드에 0-5로 지는 치욕을 당했다.

그런 히딩크 감독이 3년 만인 2000년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됐다. 허정무 감독 체제의 대표팀이 그해 아시안컵에서 부진하자 축구협회 이용수 기술위원장 등은 외국인 감독 영입에 들어갔다. 영입 대상 1순위는 프랑스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었던 에므 자케 전 감독이었다. 하지만 자케 감독은 고사했고, 2순위가 히딩크 감독이었다.

모험이나 다름없는 '한국행'을 결심한 히딩크 감독은 2001년 1월 한국 땅을 밟았다. 이후 이집트 4개국 대회 우승(4월)과 크로아티아·미국 평가전(11~12월)을 통해 '한국 축구의 구세주'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컨페드컵 및 체코 평가전(5~8월)과 북중미 골드컵(2002년 1~2월)부진 때문에 '부도덕한 외국인'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한국 축구에 선진축구를 접목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에 주변의 비난과 힐책에는 일절 신경쓰지 않았다.

그리고 소신대로 밀고나갔다. 결국 그가 옳았다. "개인기가 떨어지는 한국 선수는 빨리 주전을 정해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는 축구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경쟁선발을 고집한 끝에 자신이 원하는 선수들을 찾을 수 있었다.

"경기를 눈앞에 두고 체력훈련이 웬말이냐"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체력훈련을 강조해 결국 선수들을 유럽 수준의 체력으로 업그레이드 해냈다.

부산=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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