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그늘에도 햇볕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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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의 축구 지식은 일반적인 상식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도 밤 늦도록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승부의 세계가 던지는 스릴과 초조함 속에서도 각국 선수들의 다양한 표정과 팀워크의 흐름을 읽는 즐거움 때문이다.

히딩크, 팀워크 유난히 중시

지난주 토요일 E조 경기에서 독일팀이 사우디아라비아의 골네트를 무려 8번이나 흔들어 놓았을 때 '저렇게도 인정사정 없이 격렬한 소나기 득점포를 터뜨릴 수 있나'하는 생각에 제발 카메라가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들의 참담한 모습만은 클로즈업하지 말아주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48년 전인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대회에 참가한 한국선수들이 헝가리와의 대전에서 9대0으로 대패했을 때도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꼴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휴전 직후인 그 시대에는 TV중계도 없었고 겨우 라디오 정시 뉴스로 짤막하게 대전 결과만 보도됐기 망정이지 지금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더라면 무슨 사단이 벌어졌을 터이다.

프랑스의 지단이나 잉글랜드의 베컴, 브라질의 호나우두 선수 등이 전세계 팬들의 환호 속에 그라운드의 영웅으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은 그들의 영광을 위해 희생하는 그룹이 있기 때문임을 우리는 눈여겨 본다. 그들이 발군의 골 결정력을 보일 수 있도록 찬스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팀워크다. 이번 월드컵 개막전에서 프랑스를 격침해 검은 돌풍을 일으킨 세네갈 디우프 선수의 천금 같은 어시스트도 바로 짜임새 있는 팀워크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축구팬들의 우상인 홍명보 선수는 올 이른 봄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예를 들어 중학교에서 아주 빠른 선수가 있다고 하면 그 선수만 활용해 왔다"는 말로 기본기 보다 승부에 집착하는 축구팀 운영을 비판한 바 있다. 히딩크 감독의 공적은 한국 축구 대표팀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맹훈련시키고 그들을 높이 평가해주면서 팀 전체 조직의 생산성을 최대로 높여온 데 있을 것이다.

그는 하다못해 청소년대표 등 이른바 엘리트 코스도 거치지 못한 채 '잡초 축구인생'이라고 비웃음을 샀던 이을용 선수를 중용하며 그의 성실성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히딩크는 또 프로팀에서 버림 받은 신세였던 김남일 선수도 뽑아 길렀다. 박지성이나 송종국·설기현도 그라운드에서 포효하는 선수로 단련시켰다. 그는 팀의 득점력을 높이기 위한 탄탄한 조직을 요구했다. 김병지 선수는 경기 중 개인 플레이를 했다는 이유로 대표팀에서 9개월간 제외되는 철저한 응징을 받았다. 같은 이유로 이동국 선수는 아주 눈밖에 났다. 대형 스트라이커를 탄생시키기 위해 골 찬스를 만들어주는 팀워크가 필요하다는 게 히딩크의 전략인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에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하이 파이브(High Five)란 책은 미국의 만년 꼴찌인 시골 초등학교 아이스하키팀이 최강팀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일류회사의 엘리트 간부가 혼자만 탁월할 뿐이지 조직을 거느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리 해고 당한 후 크게 반성하면서 이 학교의 팀을 맡게 된다.

득점보다 어시스트가 값져

그는 새로운 내부 규칙을 만들어 득점을 올린 사람은 1점, 그에게 도움을 준 사람은 2점, 도움을 준 사람에게 패스해준 사람은 3점 하는 식으로 포상해 팀워크를 형성토록 했다. 스타 플레이어보다 그들의 성공을 뒷받침해준 그늘 속의 선수들에게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이 책의 메시지는 '우리 모두를 합친 것 보다 현명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None of us is as smart as all of us)'는 것이었다. 이제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 축구팀을 보는 관전 포인트는 득점 찬스를 만들어주는 그늘 속 선수들의 활동 상황을 보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작동 원리가 거기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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