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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교보문고 선정 이달의 책(12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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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작가정신, 400쪽, 1만원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나 엄격하게 말해 소설은 근대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인의 신분을 획득한 뒤에야 가능해진 모험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인이 아닌 사람에게 모험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 자유를 얻지 못한 고대인들에게 삶이란 주어진 대로 살아내야만 하는 의무일 뿐이니까. 따라서 살고 싶은 삶을 위해 자기의 존재를 던지는 모험은 그들의 몫이 아니다. 근대인에게만 주어진 위대한 선물인 것이다.

그래서 몸의 것이든, 아니면 영혼에 속하는 것이든 간에 모험은 근대 소설의 중심 주제를 이룬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소설의 정전이 대부분 모험의 여정을 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로빈슨 크루소』『걸리버 여행기』『백경』『노인과 바다』, 그리고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등이 모두 그런 모험담의 계보를 이룬다. 이 속에서 인간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는 대신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자유의지를 지키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펼친다.

그 싸움이 반드시 승리로 끝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모험의 실패가 곧 패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우리 근대인에게 자유와 희망은 동의어나 마찬가지다. 절망이란 없다. 절망은 고대 노예의 도덕이다. 그래서 모험은 그치지 않으며, 그 모험을 기록하는 소설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 실패와 좌절의 수평선 너머로 희망이 우리의 숨길처럼 뻗어 있는 것이다. 『파이 이야기』는 문학의 그런 가능성을 남김없이 품고 있는 작품이다.

‘파이’는 신들의 왕국인 인도 남동부 폰디체리에서 나고 자란 소년의 이름이다. 동물원을 경영하는 부모 덕분에 유복하게 자란 이 소년의 유일한 고민거리는 자칫 잘못 발음하면 ‘오줌’을 연상시키는 이름, 피신 몰리토 파텔 정도였다. 그래서 애칭처럼 파이라 칭하고는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가톨릭교 교당을 누비며 즐거운 유년 시절을 보낸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뀐다. 인도의 불안한 국내 정세 등을 이유로 동물원을 처분하고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문제는 캐나다를 향해 가던 일본 선적의 화물선에서 발생한다. 배가 침몰하면서 홀로 호랑이와 하이에나, 오랑우탄·얼룩말과 남게 되는 구명보트에 던져진 것이다. 거기서 얼룩말과 오랑우탄이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히고, 또 그 하이에나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끔찍한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된다. 남은 것은 작고 좁은 배에 파이와 호랑이뿐. 애초에 중국계 선원들이 파이를 구명보트에 던진 것도 이 짐승의 먹잇감이 되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파이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동물원에서 자라며 익힌 동물의 습성을 이용해 호랑이를 제어하고, 심지어 그 호랑이를 길러가며 긴 조난의 여정을 이어간다. 1977년 7월 2일 태평양 공해상에서부터 다음해 2월 14일 멕시코 해안에 닿기까지 227일 동안 소년은 구명보트에 보관돼 있던 비상식량과 도구를 이용해 갈증과 허기를 해결하면서 살아남는다. 작은 배에는 호랑이, 물에는 상어가 기다리고 있는 극한의 상황. 거기서 소년은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올리기도 하고, 바다거북을 잡아 그 피로 목을 축이기도 한다.

이 작품의 백미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공포보다 더 무서운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악착같이 호랑이에게 먹이를 해결해주는 장면이다. 파이 스스로 말하듯, 아마도 호랑이가 없었다면 그 긴 조난의 여정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가장 커다란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런 위험을 껴안고 이겨가며 목숨을 건 모험을 치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의 위대한 장면이다.

어느 때보다도 어렵고 힘든 지금 누군가 희망의 목소리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꼭 이 책을 읽어보기 바란다. 인간이 이토록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드문 경험이었다.

박철화(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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