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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업 간부, 국제대회 수상자는 이민 허용 1순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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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22면

이민은 미국에서 민감한 정치 이슈다. 사진은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시청 앞 거리에서 이민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중앙포토]

스티븐 추 에너지 장관, 에릭 신세키 보훈장관, 보비 진달 루이지애나 주지사.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다. 그러나 마음의 고향은 미국이 아닐지도 모른다. 기회의 땅을 찾아 중국에서, 일본에서, 그리고 인도에서 머나먼 미국으로 건너온 부모들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른바 이민 2세대들이다.케냐 출신의 아버지를 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영화배우를 거쳐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활약 중인 아널드 슈워제네거까지 덧붙인다면 미국을 ‘이민의 나라’라고 불러도 이의를 달기 어려울 것이다.

매년 100만 명 넘게 이민 받는 미국

미국은 매년 100만 명 이상의 합법이민자(영주권자 기준)를 받아들이는 나라다. 2009년 한 해 동안 113만818명이 미국 시민권자 바로 밑 단계로, 미국 생활에 별다른 지장이 없는 영주권자(Permanent Resident)가 됐다. 이 중 40%(46만여 명)가 새롭게 미국에 도착한 사람들이다.미국은 이민으로 만들어진 나라다. 그 성립 배경에는 민족이라는 공통점으로 이뤄진 동양 국가들과 달리 공통의 정치철학이 있다. 유럽 전제 군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인신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신대륙으로 왔던 이들은 그런 이념에 동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미국 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지난 200여 년 동안 흑인에 대한 처우 문제 등 일부 오점은 있었지만 큰 틀에서 미국 헌법과 역사는 이 같은 원칙을 고수했다.

오바마 대선 승리 열쇠는 히스패닉계 이민들
미국 사회에 ‘이민은 정치다’(Immigration is politics)라는 말이 있다. 정부의 이민정책이 현실 정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의미다. 공화당과 민주당,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 사이에선 이민정책을 놓고 늘 거센 공방이 있었다.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선 당시 이민 개혁(Immigration Reform)을 임기 첫해의 핵심 정책으로 추진하겠다고 공약했다. 불법체류자에게 합법적인 신분을 허용하고 불법이민 단속 과정에서 이민자에 대한 부당한 대우를 중단하겠다는 것이 공약의 핵심이었다. 이를 통해 오바마는 불법체류 과정을 거쳐 합법적 시민이 된 경우가 가장 많은 히스패닉계 유권자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오바마는 당선 초인 지난해 6월 재닛 나폴리타노 국토안보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이민개혁 전담반을 설치했다.

이어 1100만 명에 육박하는 불법체류자에게 일정한 절차를 거쳐 합법적인 신분을 허용하는 대신 불법이민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이민개혁 원칙을 재차 천명했다. 올 11월 상ㆍ하원과 주지사 선거가 함께 치러지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오바마는 다시 한번 히스패닉계의 지지가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달 28일 오바마는 남미계의 유력 노조 지도자들, 친이민개혁 시민단체 간부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민개혁 추진을 논의했다.

이민개혁이 민주당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300만 명이 넘는 불법체류자들을 일시에 사면한 것은 1986년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정부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취임 초에 발생한 9·11테러(2001년)로 신규 비자발급 및 불법체류자 관리를 엄격하게 했다가 임기 말에 반대의 이민개혁을 시도했다. 불법체류자들에게 임시노동허가증(working permit)을 발급한 뒤 절차를 거쳐 영주권을 주려 했다. 상·하원 모두 비슷한 골자의 법이 통과됐지만 2007년 결국 “범법자에 대한 사면”이라고 거세게 반대하는 반이민단체의 목소리를 꺾지 못했다. 선거를 앞두고 불거진 이민개혁 논란은 늘 다가오는 선거에 어떤 선택이 유리할 것인가에 좌지우지됐다.

최근 애리조나주에서 제정한 이민단속법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불거진 이민개혁 논란은 과거와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헌법 정신과 현실 정치를 뛰어넘어 경제의 영역으로 그 논쟁의 뿌리가 확대되고 있다.

4월 말 멕시코와 국경이 접해 있어 신규 불법입국자가 많은 애리조나주가 지역경찰에게 불법체류자로 의심만 돼도 불심검문할 수 있도록 규정한 이민단속법을 제정했다. 불법체류 자체를 주(州) 범죄로 규정해 징역까지 살 수 있게 했고, 불법체류자들의 일용직 고용까지 금지시켰다. 그동안 이민문제는 연방정부의 권한이지 주정부가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는 데 암묵적인 공감대가 있었다. 이것이 깨져버렸다. 오바마 정부는 즉각 반대하고 나섰다. 7월 29일 이 법이 발효되기 전에 행정소송을 통해 무력화하겠다는 계획도 언론에 공개됐다.

관할 책임자가 아니라고 할 만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나서 “이민정책은 연방정부가 결정해야 하며, 연방 법무부가 애리조나 이민법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곪을 대로 곪은 문제가 터짐으로써 예상했던 대로 지역별로 극단적인 찬반 행태가 벌어졌다. 애리조나주의 공화당 소속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사무실에는 히스패닉계 불법체류자 4명이 쳐들어갔다. 캘리포니아주 등 이민자가 다수를 차지하는 곳은 애리조나와의 사업 단절을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공화당 소속인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린지 그레이엄은 “피부색과 인종에 근거해 불법체류 여부를 가릴 소지가 크다”며 애리조나 이민법의 위헌 소지를 지적했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유타·미네소타·네바다·메릴랜드 등 10여 개주에선 애리조나 이민법과 비슷한 내용의 법안 추진에 나섰다. 이들 법안은 불법체류자의 취업을 차단시키는 내용이 핵심이다. 고용주가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전자신원조회 프로그램에 의무적으로 가입해 종업원 채용 이전에 신원을 조회해 불법체류자일 경우 취업을 불허하도록 하는 것이다.

금융위기 후 '일자리 뺏긴다'인식 퍼져
이민법 전문인 전종준 변호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 환경이 급격히 나빠지고 실업률이 올라가면서 미국 시민들 사이에서 ‘불법체류자들이 우리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인식이 생겨났다”며 “이제 정치논리가 아닌 경제논리가 이민정책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변호사는 “민주당의 주장 역시 불법체류자를 양성화해 세금을 거둬들이고, 여러 비즈니스에 활용하면 경기회복에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경제논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애리조나주의 접근법에 찬성하는 쪽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세라 페일린 전 공화당 부통령 후보 등이 연방 차원의 강력한 이민단속법 제정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다 이 같은 여론을 등에 업고서다.

전 변호사는 “미국은 여전히 우수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석사학위 소지자, 국제적 기업의 간부, 올림픽과 저명한 학술대회 등 국제대회 수상자들을 1순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한국계 이민자들의 성공도 눈부시다. TV 프로그램 ‘서바이버’ 게임에서 우승해 유명해진 뒤 오바마선거 캠프를 거쳐 연방통신위원회(FCC) 부국장에 발탁된 권율(35)씨를 비롯해 각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민 2세대들을 일일이 꼽을 수 없을 정도다. 권씨는 “점차 커지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미 한국대사관 조용천 워싱턴 총영사는 “이민문제에서도 제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문화적 공감대”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우수한 인력을 이민자로 받아들였을 경우 미국 사회처럼 그 가치를 존중해줄 수 있을지 한 번쯤 생각해볼 문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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