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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간으로 우려낸 국물, 일본 탕요리의 신세계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바라키(茨城)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서 간단하게 지역 소개를 끝낸 담당 공무원이 어색한 침묵이 불편했는지 일본 여러 지역의 다양한 음식을 맛본 허 화백에게 이번 방문에서 가장 기대되는 요리를 물어본다. 잠시 메모를 하던 허 화백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일본식 아귀탕인 ‘도부지루(どぶじる)’를 꼽는다. 일본 사람들은 생선도 참치·도미 등 잘생긴 것들만 가려 먹는 줄 알았는데 도부지루를 듣고 색다른 취재가 될 것 같아 무척 반가웠다는 것이다. 어촌체험 당시 잡은 가오리를 그냥 버리는 모습에 깜짝 놀랐던 경험을 덧붙이며 일본의 아귀요리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며 호기심도 숨기지 않는다. 허 화백의 선택이 흡족했는지 공무원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그리고 “한국의 아귀찜처럼 전국구 음식은 아니지만 세 가지 특별함으로 인해 인기가 높다”고 운을 띄우며 기대감을 한껏 부풀린다.

참치 해체쇼 하듯, 아귀 매달아 놓고 손질
시식 장소로 정해진 이즈라(五浦)호텔에 도착했다. 마치 대역죄를 저지른 죄수처럼 통나무로 만든 삼각대 중앙에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있는 아귀가 일행을 맞는다. 눈앞에 펼쳐진 그로테스크한 풍경에 순간 당황한 허 화백이 상황 설명을 부탁한다.
본디 이바라키 지방에서는 미끄러운 아귀를 안전하게 손질하기 위해 도마 대신 매다는 방식을 선호했는데 최근 들어 관광객의 흥미를 자아내고 요리 인지도를 상승시키기 위해 간단한 퍼포먼스로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것이 도부지루의 첫 번째 특별함이다.

준비 과정 역시 맛 평가에 중요 부분이다.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다”는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큰 부엌칼을 든 주방장이 물을 넣어 통통하게 부풀린 아귀의 지느러미를 가차없이 자르고 이내 꼬리를 쳐낸다. 이어 껍질과 아가미 등을 손질하는데 중간중간 부위별 조리 방법을 안내하는 배려를 잊지 않는다. 재료의 핵심인 간을 꺼내는 모습은 백년 묵은 산삼을 캐내는 모습처럼 신중하다.

아귀 손질은 크게 지느러미, 껍질, 아가미, 간, 난소, 위장, 살의 순서로 크게 일곱 가지 부위로 나뉜다. 입을 제외한 모든 부위가 요리에 사용된다고 한다. 참치 해체쇼 못지않은 긴장감에 고무된 허 화백이 이내 두 번째 특별함에 관심을 보인다. 일행들이 이런저런 예상으로 의견이 분분하자 주방장이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겠다며 분위기 수습에 나선다. 도부지루의 도부는 수채 또는 하수구, 지루는 국(물)이라는 뜻인데, 전체적인 맥락으로 따져 보면 지저분한 요리란 의미가 담겨 있다. 원래 소수의 어부가 허기를 채우기 위해 배 위에서 간과 미소를 이용해 뻑뻑하게 만들어 먹었던 미천한 음식이다. 실제 완성된 요리를 보면 걸쭉하게 녹은 아귀간과 부재료가 어지럽게 어울려 있어 파격적인 이름이 이해가 된다. 이름과 요리를 놓고 보면 호감이 반감되지만 그 맛은 세 번째 특별함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아귀찜으로 육질의 탁월한 맛을 익히 알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도 아귀뼈로 우려낸 육수와 간, 그리고 미소로 맛을 낸 국물이 선사하는 묵직함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지방의 고소함이 짙게 깔려 있어 일본의 그 어떤 국물요리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그동안 “맑고 옅은 맛 일색인 육수를 일본 요리의 한계로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로 고정관념이 깨졌다”는 허 화백과 “간은 미나리와 함께 수육으로 먹어야 제 맛”이라며 볼멘소리를 하던 일행들도 이미 도부지루 맛에 흠뻑 취한 듯 서로 말이 없다.
여기에 볼살·가슴살 등 아귀를 부위별로 접하는 재미가 쏠쏠하고 배추·버섯·대파·두부 등 부재료의 질감 또한 풍부하다. 여기저기서 한국 소주 이야기가 나올 만한 맛이다. 마지막으로 남은 국물에 밥을 비벼먹고 포만감에 배를 두들기며 기분 좋은 마무리를 짓는다.

오랜만에 취재와 시식 모두 즐겁게 마친 허 화백이 도부지루를 이바라키 대표요리로 키우면 좋겠다는 조언을 내놓는다. 얼마 전 직항편이 개설됐는데 이 정도 맛이면 앞으로 방문할 한국 관광객들 입맛은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는 뜻이다.

못생긴 외모 때문에 이름도 곱지 않은 아귀
아귀를 보면 떠올리는 첫 마디는 ‘못생겼다’이다. 생선요리가 발달한 한·일 양국에서조차 한때 잡으면 바로 버리는 생선으로 유명했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무의미할 정도다. 이름 역시 추한 생김새와 왕성한 식욕에서 비롯됐다. 한국은 불교의 삼악도 중 탐욕스러운 자들이 죽어 떨어진다는 아귀도가 유래다.

실제로 아귀는 물고기는 물론이고 깡통이나 동전까지도 가리지 않을 만큼 먹성이 좋아 적절한 비유라 할 만하다. 일본어로 아귀는 안코(アンコウ)인데 이 역시 긍정적인 뜻은 아니다. 여러 가지 설 중에 어리석은 또는 얼빠진 등의 의미인 안구(暗愚:あんぐ) 유래설과 두꺼비를 가리키는 지바(千葉) 지방의 사투리 안고(アンゴオ)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재미있다. 이런 이미지 탓에 대중에게 맛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이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니 최근의 인기를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만하다. 다만 한국의 아귀찜이나 수육에 비해 일본 아귀요리는 지역색이 강한 요리로 인식되고 있으며 관광객들 위주로 소비가 이뤄지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호준 ‘식객’ 취재팀장 만화 허영만

*일본자치체국제화협회 클레어(Clair)와 한진관광의 후원으로 2년간 일본 각지를 방문, 다양한 요리와 문화를 경험하고 그 체험을 독자들과 나눌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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