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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성급한 긴축이 글로벌 경기 침체 다시 부른다” VS “중국이 새 성장 엔진 허리띠 졸라매도 더블딥 없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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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24면

“글로벌 경제가 결정적 시기(Crucial Period)에 들어서고 있다.”
세계 6위 자산운용사인 미국 노던트러스트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폴 캐스리얼이 최근 보고서에서 한 말이다. 그는 “경제가 깊은 침체에서 회복하기 시작한 지 12~18개월 사이가 결정적 시기”라며 “경제가 회복세를 이어갈지 아니면 더블딥(이중침체)에 빠질지가 그 시기에 결정된다”고 말했다.

불붙은 세계 경제 더블딥 논란

근거는 역사적 경험이다. 미국 경제는 1845년 이후 모두 33차례 침체에 빠졌다. 이 가운데 더블딥은 모두 4차례였다. 1913년과 20년, 대공황기(29~39년), 81년 등이었다. 캐스리얼은 “미국이 경험한 더블딥이 모두 ‘결정적 시기’에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미국·유럽 경제가 지난해 7월께 회복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세계 경제가 캐스리얼이 말한 운명적인 갈림길에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캐스리얼은 “경제가 극심한 침체에서 회복하기 시작해 12개월 정도 지나면 새로운 불안요인이 발생하면서 경제정책 컨센서스(합의)가 깨지는 양상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회복 피로증후군이 발생한다는 얘기다.
 
인도·스웨덴 금리 전격 인상
지난주 주요 국가들의 증권시장이 가파르게 하락했다. 특히 중국 상하이 주가는 15개월 최저 수준으로 곤두박질하기도 했다. 이른바 ‘G3(미국·중국·유럽) 리스크’ 탓이었다. 그리스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가능성(7월 위기설)이 제기되고 있는 와중에 중국 경기 둔화 전망이 제기됐다(인터뷰). 미국·유럽 대신 세계 경제 회복을 이끌 엔진으로 여겨졌던 중국 경제가 둔화할 수 있다는 전망은 곧 더블딥 우려로 이어졌다.

세계 최대 신용평가회사인 미 무디스가 스페인 신용등급 하락을 경고했다. 현재 스페인이 최고 등급인 AAA에서 강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은 이를 ‘스페인이 제2의 그리스가 될 수 있다’는 시그널로 받아들였다. 빠른 회복세를 보이던 미국에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났다. 공급관리자협회(ISM)의 제조업지수가 두 달 연속 떨어졌다. 경제 회복 엔진인 제조업이 활력을 잃어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주택시장과 고용·소비 등에서도 경고등이 깜빡거렸다.

미국 예일대 로버트 실러(경제학) 교수는 지난주 뉴욕 타임스(NYT)와 인터뷰에서 “유럽 재정위기는 고질적인 문제이지만 중국과 미국 경기 둔화 조짐은 부양정책 효과가 약해지면서 나타난 새로운 리스크”라고 말했다.

단기 지표의 불안한 모습과는 달리 글로벌 경제의 추세를 보면 흐름은 여전히 양호한 상태라는 진단도 있다. UC버클리대 베리 아이켄그린(경제학) 교수는 최근 보고서에서 “세계 산업생산과 국제 교역량 등이 아직 이전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대공황 시기와 견줘 아주 빠르게 회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그래프>.

경제 현상이 엇갈리는 바람에 주요 국가 경제정책 담당자들이 서로 다른 진단과 처방을 내놓고 있다. 유럽은 재정위기를 이유로 재정긴축의 고삐를 당기고 있다. 중국 정부는 “경제가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다”며 “통화량 증가를 억제하는 정책을 이어 가겠다”고 밝혔다. 미국 쪽은 유럽·중국 움직임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중국 경기 둔화 우려로 시장 흔들
미국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이나 티머시 가이트너 재무장관 등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드러내 놓고 더블딥 가능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대신 미 집권세력과 가까운 프린스턴대 폴 크루그먼(경제학) 교수가 나섰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크루그먼은 최근 NYT에 쓴 칼럼에서 “유럽의 긴축은 경제학자 존 M 케인스가 말한 ‘저축의 역설’과 같은 효과를 낼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 국가들이 모두 긴축(저축)하면 개별 국가 차원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수요가 줄어 경제가 침체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다. 이어 그는 “대공황의 일시적 회복기인 35~36년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 많은 사람이 공황이 끝나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며 “하지만 미 경제는 37년 다시 침체에 빠져들었다”고 지적했다.
‘닥터둠’인 뉴욕대 누리엘 루비니(경제학) 교수가 크루그먼 교수와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지난달 30일 CNBC 방송에 출연해 “유럽이 긴축정책 때문에 더블딥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며 “일본 역시 벼랑 끝 위기에 몰렸고 중국도 성장 둔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비니 교수는 침체의 전염도 경고했다. 그는 “유럽의 경제 침체는 가장 먼저 미국에 일격을 가할 것”이라며 “유로화 약세가 미국 수출을 둔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반면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금융시장 안정이 경제 성장의 필수적 요인”이라며 “유럽의 긴축은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계 경제는 분명히 회복 국면에 들어섰다”며 “성장 속도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부양으로 회복하는 단계를 지나 이미 경제 자체의 성장엔진(민간 수요)이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머빈 킹 영란은행(BOE) 총재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금융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며 “2009년 3분기 시작된 글로벌 경제 회복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유럽 출신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우리는 세계 경제가 꾸준히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을 바꾸지 않았다”며 “중국 등 신흥경제가 유럽의 재정위기 여파를 상쇄해 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유럽·일본으로 침체 전염될 수도
미국과 유럽·중국의 입장 차이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선언문에 그대로 반영됐다. G20 정상들은 지난주 초 캐나다 토론토 회의를 마치며 ‘성장 친화적 재정긴축(growth friendly fiscal consolidation)’에 합의했다. 어울림이 떨어지는 ‘성장’과 ‘긴축’이란 단어를 ‘친화적’이라는 말을 넣어 어설프게 결합한 인상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볼썽사납지 않게 조합해 발표한 흔적이 역력하다.

파이낸셜 타임스(FT)는 회의 직후 “금융위기 직후 유지돼 온 국제 공조에 균열이 엿보이기 시작했다”며 “각국이 자국 사정에 따라 경제정책을 채택해 실시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고 평가했다. 지난 주말 인도·스웨덴이 기준금리를 올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글로벌 리더들은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쫓아야 하는 처지다. 한쪽으로는 경제 회복을 유지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금융시장 불안을 진정시켜야 한다. 더욱이 유럽 쪽은 긴축하지 않으면 금융시장의 응징을 피하기 어렵다. 바로 기존 채무를 상환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길이 막히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움직임도 비슷한 맥락이다. 돈을 빌려 주는 쪽은 인플레 때문에 채권의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공황 전문가인 UC버클리대 데이비드 로머 교수는 “국제 공조는 글로벌 리더들의 무지나 무능함 때문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붕괴하곤 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리더들이 공조를 깨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상황에 떠밀려 자국 위주 정책을 채택하게 된다는 얘기다.

실제로 29년 대공황 직후 미국·영국·프랑스 정치 리더들과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관세 인상이 결국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로머 교수는 “허버트 후버 미국 대통령은 기업이 파산해 실직자가 급증하는 상황에 밀려 관세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최근 흔들리는 국제 공조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에피소드다.

캐스리얼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결정적인 시기에 곧잘 벌어지는 컨센서스와 국제 공조 붕괴가 위기 대응 능력을 떨어뜨려 더블딥을 일으키곤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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