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따로 러시아 따로 … 브릭스 전략 다시 짤 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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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호 30면

나로호 2차 발사가 또다시 아쉬움 속에 실패로 끝났다. 사고 원인 규명에 우리 측 관계자의 접근조차 쉽지 않다거나 3차 발사가 불투명하다는 등 심란한 소식들이 이어졌다. 우주발사체 개발 기술을 보유하지 못한 나라의 서러움이다. 지금까지 독자적으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나라는 9개국에 불과하다. 미국과 영국·프랑스 등 선진국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러시아·중국·인도 등 우리보다 산업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온 국가들이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일 수 있다. 이른바 ‘브릭스’ 제대로 알기가 필요한 대목이다.

송기홍의 발로 뛰는 세계 경영

브릭스(BRICs)라는 명칭은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 네 나라의 영문 이름 첫 글자에서 따온 것이다. 2000년을 전후해 급속한 경제성장 궤도에 올라선 신흥경제대국을 묶어서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들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엄청난 규모와 성장성을 들 수 있다. 브릭스는 전 세계 육지면적의 26%, 인구의 42%를 차지한다. 이들의 국내총생산(GDP)을 더한 값은 한국의 약 10배로 전 세계 GDP 총합의 15%에 달한다. 2002년부터 2008년까지 브릭스 경제는 연평균 22% 성장하면서 같은 기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8%를 세 배 가까이 앞질렀다. 성장세는 앞으로도 이어져 2009년부터 6년간 전 세계 경제성장분의 35%가 이들 국가에서 이뤄질 전망이다. 머지않아 전 세계에서 창출되는 부의 5분의 1 이상을 이 네 나라가 만들어 내게 된다는 얘기다.

막대한 보유자원 역시 이들의 뒤를 받치는 힘이다. 방대한 영토와 인적자원은 물론, 날로 중요성을 더해가는 농업자원과 광물자원의 매장량 및 생산량에서 세계 상위권이다. 러시아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은 세계 2위 산유국이다. 중국은 매년 4억3000만t 이상의 철광석을 생산해 세계 1위에 올라 있고, 석탄 생산량도 31억t으로 1위다. 브라질은 국기의 초록색 바탕이 농업과 임업자원을, 노란색은 광물자원을 상징할 만큼 자원 부국이다. 이들은 최근 자원을 무기로 공조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국제사회를 더욱 긴장시키고 있다.

외환시장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이미 무시 못할 수준이다. 지난 10여 년의 성공을 바탕으로 착실히 달러를 쌓아와 현재 전 세계 외환보유액의 42%를 수중에 넣고 있다. 한때 미국이 기침을 하면 브릭스 국가가 감기에 걸린다는 우스개가 있었지만 이미 지난 얘기다. 오히려 미국과 유럽연합(EU) 국가들이 이들의 눈치를 봐가며 재정 및 금융정책을 펴는 상황이다.

브릭스는 소비시장으로서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이들 국가에서 연간 가처분소득 6000달러 이상의 중산층 소비자 규모는 올해 8억 명을 넘어 사상 최초로 선진 7개국(G7) 국민 수를 추월할 전망이다. 브릭스 국민은 더 이상 저렴한 노동력의 원천이자 ‘자원’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글로벌 기업들이 탐낼 만한 구매력을 갖춘 ‘고객’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들의 달라진 위상에 주목한 많은 기업들이 앞다퉈 공략에 나서고 있다. 이미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기업도 있지만 고전하는 기업들도 적지 않다. 부진의 이유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들을 단일한 시장과 소비자로 파악하는 성급한 일반화와 단순화에 있다. 네 나라가 중요한 특성들을 공유하는 것은 맞지만 시장이라는 측면에서 각 나라는 동질적이라기보다는 이질적이다. 이들을 같거나 비슷한 시장이라고 혼동하는 것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네 나라는 주요 산업구성과 규제 환경, 시장의 경쟁구도 측면에서 국가별 특수성이 뚜렷하다. 특히 고객의 수요는 한 국가 안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다양성을 보이기도 한다. 소비자 니즈(needs)라는 관점에서 이들은 글로벌화·표준화돼 있는 선진국 시장과 확연히 다르다. 세계화의 트렌드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자신들만의 독특한 취향과 선호가 분명하다.

평균적인 소득과 정보 수준이 낮다고 해서 철 지난 제품이나 수준 낮은 서비스로 쉽게 승부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선진국향(向)으로 개발된 하나의 제품, 하나의 전략으로 브릭스 경제권을 공략한다는 발상 또한 잘못이다. 현재의 고객 니즈와 향후 변화 추이를 면밀히 고려해 국가별로 최적화된, ‘반 발짝 내지 한 발짝 앞선’ 제품과 서비스 개발이야말로 성공을 위해 끼워야 할 첫 단추다.

성장과 부의 심각한 불균형으로 인한 딜레마 역시 주의할 점이다. 중국은 베이징·상하이·광저우 등 동부 연안도시, 인도는 북부의 델리와 서부의 뭄바이, 러시아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우랄산맥 서부 핵심도시, 브라질은 상파울루 등 동부 지역에 부와 수요가 집중돼 있다. 이들 핵심 지역에서는 이미 수많은 글로벌 기업들이 사활을 건 경쟁을 펼치고 있다. 반면 향후 성장이 예상되는 기타 지역에는 아직 외국기업의 접근성이 낮아 많은 시간과 투자가 필요하다. 시장의 성장가능성에 도취되기에 앞서 냉철하게 지역별 진출 전략과 투자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브릭스 경제권에 대한 한국기업의 성적표는 양호한 편이다. 10년 전 선진국 업체들이 관망할 때 한국의 선도기업들은 과감하게 시장을 열고 들어가 상당한 성과를 일궜다. 전자·자동차 분야의 대기업뿐 아니라 의류·생활용품 등 다양한 산업에서 한국산 제품이 각광을 받고 있다.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크렘린궁 남쪽의 다리는 ‘LG 다리’라는 애칭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모스크바 최대 번화가인 트베르스카야 거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은 삼성과 LG의 광고판이다. 인도 최대 전자상가 ‘네루플레이스’와 브라질의 최고급몰 ‘모룸비 쇼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단연 한국 브랜드다. 현찰 뭉치를 들고 와 우리 제품을 사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가슴 벅차 오르던 기억이 새롭다.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다. 전열을 정비한 선진국 업체들이 반격의 강도를 높이고 현지 업체들의 도전이 거세지고 있는 지금은, 한국 기업들이 그간 쌓아온 입지를 발판으로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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