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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대통령의 재선과 북한의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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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집권 2기의 외교노선

온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2004년 미국대선은 부시 대통령의 승리로 끝이 나고, 향후 4년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는 부시 2기 행정부의 정책 방향과 북한의 변화 여부에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향후 미국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과 관련 ‘변화설’과 ‘불변설’의 두 견해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첫 번째 설인 변화설은 부시 2기의 외교가 1기 때와는 달리 보다 실용주의적이고 타협적인 색채를 가질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역사적 유산, 1기 때의 학습효과를 거울삼아 부시 행정부가 보다 현실적이고, 실용주의적 외교를 펼칠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 입장에 선 논자들은 미국이 팽창주의적이며, 일방적인 외교를 펼칠 수 있는 군사적 자원을 갖고 있지 않다는 현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에 반해 불변설은 부시 2기의 외교노선이 1기 노선의 연장선 속에 있으리라고 보고 있다. 대선 승리로 테러와의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 대해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고 판단한 부시 대통령이 1기의 힘의 우위에 의한 일방주의 외교를 지속할 가능성을 점치는 것이다. 당선 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내 길을 가겠다,” “미국을 장기적으로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촉진하는 것,” “생각이 다른 나라와 같이 가지 않을 것”이라며 일방주의를 지속할 속내를 비쳤다.

부시 집권 2기를 이끌 외교 안보팀의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우선 부시 행정부에서 대표적인 협상론자였던 온건 성향의 콜린 파월 미국무가 사임하였고, 강경론자인 존 볼튼 같은 이는 오히려 일계급 승진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일방주의적 성향을 가진 부시 행정부 내에서 콜린 파월은 균형 감각을 가지고서 다자주의적 원칙 하에 외교를 펼친 온건파로 여겨져 왔다. 문제는 파월이 대통령의 권유가 있었다면 남아서 계속 국무장관직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파월의 잔류를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고, 결국 파월은 물러나게 되었다. 콘디 라이스는 애초에 국방장관직을 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파월의 사임으로 공석이 된 국무장관의 자리에 안게 되었다. 도널드 럼스펠드의 잔류는 이라크 문제를 매듭짓고 싶은 럼스펠드의 의지와 전쟁 중에 지휘관을 바꾸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뜻이 맞물린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시 2기의 내각은 대통령의 의중을 아는 사람들로 채워지는 명실상부한 "Kitchen Cabinet"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콜린 파월의 사임으로 부시 외교의 방향은 변화보다는 연속성, 견제와 균형보다는 일관된 입장으로 나갈 것이 전망된다. 부시는 국무, 국방, CIA 등 부처간 갈등이 자신의 외교 목표 수행에 차질을 가져왔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집권 2기에서는 보다 행정부가 단일한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 줄 것을 바라는 한편, 각 부처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 하고 있다.

네오콘,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은 기존 노선의 지속을, 실용주의적,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은 과거 공화당 노선으로의 회귀를 원하고 있다. 결국 부시 2기의 대외정책의 방향은 네오콘과 전통적 보수주의자 사이의 힘의 균형에 의해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부시 행정부 내에서 힘의 역학관계를 고려해 봤을 때 부시 행정부는 민주확장론으로 대표되는 일방주의적 외교를 지속하는 가운데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네오콘의 독주에 간혹 제동을 거는 양상으로 진행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부시 2기의 한반도정책

부시 행정부의 세계전략의 큰 틀 아래에서 미국의 대북정책이 결정될 것이다. 미국 사회의 전반적 보수화, 우경화 경향을 봤을 때 ‘악의 축’의 하나인 북한과 김정일 정권에 대해 미국이 먼저 관대한 양보를 보이기는 힘들 것으로 예측된다. 부시 2기 내각에 강경파가 득세함으로써 한반도 정책도 1기 때에 비해 대북정책이 온건해지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게 됐다. 2기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는 기존 노선이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콜린 파월 미국무의 사임에 이어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과 제임스 켈리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동반 퇴진하게 되면 부식 1기의 ‘한반도 라인’은 모두 교체되게 된다. 부시 1기 때 콜린 파월과 도널드 럼스펠드의 힘의 균형에 의해 한반도 정책이 오락가락했던 데 비해 훨씬 일관성을 가지고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부시 대통령이 딕 체니 부통령에게 대북정책의 전권을 위임할 가능성도 있는데 이 경우 대북 강경 기조의 견지가 예상된다.

NSC 아시아담당 국장에 임명된 빅터 차는 네오콘 등 이데올로그들과는 일정한 입장 차이가 있으나 그 역시 압박이 북한의 변화를 이끌 유일한 대안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다는 측면에서 한국의 포용정책이 기본인 대북정책 철학과는 일정한 거리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빅터 차의 기용은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갖게 한다. 그는 경제제재를 비롯한 압박수단을 추천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며, 민주당의 대북 협상 시와 같은 인센티브의 제공에는 인색한 면모를 보일 것이다.

향후 미국이 북핵문제의 해결과 관련 취할 수 있는 행동은 크게 (1) 조기 타결 노력, (2) 6자회담의 지속을 통해 주변국들과 공조에 의한 해결 모색, (3) 의도적 무시, (4) 고립작전을 통한 내부 붕괴 유도, (5) 군사행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안은 현재 미국에게 크게 매력적이지 않은 것 같다. 부시 행정부는 민주당 정권처럼 북한에 많은 인센티브를 주고 북의 핵포기를 ‘사는’ 방안을 선호하지 않는다. 일단 미국외교의 1순위는 이라크의 안정화에 있기 때문에 북한과의 담판은 시기적으로 늦게 올 수 있다. (5)안은 정밀타격, 선제공격을 이용하는 것인데 현 시점에서는 주변국의 반대와 북핵의 모호성 때문에 효용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네오콘들은 준비를 갖춰 놓고 북한이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강행하거나 핵물질을 제3국에 이전하면 미국은 곧 무력 대응에 나설 것이다. (3)안은 부시 1기에 어느 정도 사용됐으나 이미 칠레 한미 정상회담에서 미국이 북핵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겠다고 약속한 이상 사용하기가 수월치 않을 것이다. (4)안은 네오콘이 선호하는 안으로서 이들은 경제제재 및 PSI를 통한 해상/항공로의 봉쇄를 통해 북한 정권을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미국이 부시 2기 행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곧바로 북한 고사작전에 돌입하리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에 이 선택이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낮다고 볼 수 있다. (4)안은 (5)안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결국 현재 가능성이 제일 많은 선택은 두 번째 주변국들과 공조를 취하며 6자회담의 틀 내에서 북핵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미국의 최대 관심은 일단 이라크 안정화에 있기 때문에 미국은 6자회담을 몇 차례 더 열면서 상황이 악화되지 않는 선에서 북핵문제를 ‘관리’하려고 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북핵불용, 북의 선핵폐기라는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전술적 유연성은 다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6자회담의 테두리에서 주변국을 최대한 활용 북한의 핵포기를 유도해 낸다는 기본 구상을 유지한 채 대화를 지속하되, 한시적 대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태도 변화가 포착되지 않으면 차츰 압력의 수위를 높여 나갈 것이다. 대북 압력수단에는 PSI, 대북 인권법안, 유엔 안보리 상정들의 수단이 동원될 수 있다.

미대선 이후 북한의 반응

미국의 대선 결과에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적잖게 실망했을 것이다. 대선 이후 북한이 일단 강경한 논조를 피하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북한은 현재 6자회담에 복귀하기 위한 명분 축적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일단 평양 당국은 겉으로는 아직 회담 속개의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11월 11일 장치웨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북한이 “미국 대선 이후 미국이 취하는 대북정책의 방향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같은 날 북한과 납치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일본 실무단도 북한이 조기에 6자회담을 개최할 환경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고 전해왔다. 이러한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단도직입적으로 6자회담 무용론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일단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미대선이 끝나고 부시 대통령의 재선이 확정된 마당에 북한이 계속해서 6자회담을 거부하기는 힘들 것이다. 북한은 대선 전 미국의 적대시 정책 포기, 북한 인권법안 폐기, 핵동결 시 보상에 미국 참여, 한국핵문제 의제에 포함 등 전제조건을 내걸었으나 이런 조건의 성사 여부에 관계없이 회담에 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자회담의 당사국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4차 회담의 개최를 요구하는 것을 무시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6자회담의 조기 참여 여부와 관계없이 북한 당국은 부시 2기 새로운 대미정책을 짜기 위한 정보수집과 분석을 하며 숙고를 계속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은 부시 2개 외교안보팀의 진용이 확정되고, 한반도정책의 윤곽이 들어나는 시점까지 계속될 것이다. 북한은 우선 칠레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분석하고, 내년 초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와 취임사에서 북한과 북핵문제가 어떤 비중을 가지고, 어떤 각도에서 다루어지는지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북한은 나름대로 신년사를 통해 대내외 국정목표를 밝히고 2005년을 맞는 각오를 다지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대미 메시지를 보낼 가능성도 있다.

베이징 11월 7-9일 사이 허수림 민경련 베이징 총대표 등 민경련 관계자를 만난 한 국회의원은 북한이 현재 정부수집 중이며 곧 전략적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전해왔다. 즉 “김정일 위원장이(부시 재선 이후의) 전략적 판단에 앞서서 아주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정보와 정책적 판단의 근거를 듣고 싶은 흐름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정세분석이 끝나는 대로 북한은 6자 회담에 복귀할 것이다.

북한의 선택

북핵문제 및 대미정책과 관련 향후 북한이 사용할 수 있는 선택은 ‘강경노선’, ‘지연전술’, ‘전략적 결단’의 세 가지이다. 위의 세 가능성 중 강경노선과 지연전술을 번갈아 쓰는 혼합형도 가능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정권 생존의 차원에서 핵무장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으며, 체제불안에서 선(先) 핵포기를 받을 수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각은 북한이 ‘벼랑끝 외교’를 다시 사용할 것이며 결국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될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펼치다가 자칫 레드라인을 넘어버리면 한반도의 평화는 크게 위협받을 것이다. 이미 북한은 NPT에서 탈퇴를 선언했으며, IAEA의 사찰을 거부하고 있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의 연장선에서 북핵문제를 다루는 현실에서 북한이 사용할 여타 강공 카드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북한이 벼랑끝 외교를 펼치기에 내외적 환경이 좋지 않다. 우선 북한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들 수 있다. 2002년 7.1조치 이후 인플레이션과 빈부격차의 확대로 일부 소비품의 공급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반적 경제난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에너지 부족과 기간시설의 노후화로 산업 가동률 또한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결국 북한경제의 회생을 위해서는 개방을 통해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 당국은 추가적인 경제개선 조치를 취하기 위한 적절한 시점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내적인 어려움 속에서 북한이 먼저 미국과의 대결 노선을 취해 더욱 어려운 상황을 조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태도도 북한이 벼랑끝 전술을 쉽게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북한이 끝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핵개발을 지속하는 경우 미국은 주변국을 동원하여 북한에 대한 제재를 시작할 것이다. 미국의 경제제재가 본격화되면 일본 또한 대북 압박에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편승,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보통국가의 꿈을 이루려 하고 있다. 납치문제의 미해결로 일본열도가 북한 혐오로 들끓고 있는 것도 북한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자민당은 이미 5단계 제재안을 마련해 놓고 있다. 5단계안에 따르면 일본은 1단계에서 인도적 지원을 중지하고, 2단계에서 대북 교역과 송금 모니터링을 시작하며, 3단계에서 교역과 송금을 조건부로 금지한다. 4단계에서 교역과 송금을 전면 금지하고, 5단계에서 북한 선박에 대한 출입 금지를 실시한다는 골자로 되어 있다.

후진타오가 이끄는 중국에서 북한에 대한 ‘신사고’가 나오고 있는 것도 북한이 부담을 느낄 만한 부분이다. 중국의 논객들 사이에 ‘북한 완충지대론’을 대신하는 ‘북한 부담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 변화하는 중국의 현실이다. 즉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갖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일각에서는 북한의 모험적 행동으로 동북아시아의 안정을 헤쳐 중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시각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상기한 대내외적 요인들은 북한이 먼저 초강수로 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테러와의 전쟁의 시대에 위험도가 높은 강경노선에 비해 북한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 지연전술이다. 북한이 동시행동을 내세우며 선뜻 핵을 포기하지 못하는 데에는 “제2의 이라크가 될 수 없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즉 먼저 무장을 해제하고 나면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단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북의 이러한 우려는 향후 북한이 미국이 변한 만큼만 변하는 ‘주고받기(tit-for-tat)’ 방식의 채택을 가능하게 한다. 미국이 전략적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는 전술적 유연성을 보일 경우, 북한도 따라서 유연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지연전술 하에서 경제 개혁, 개방을 가속화하며, 중국 및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하고, 남북관계를 개선시켜 한국의 중재 역할에 기대어 미국이 예봉을 피해보려는 전략을 함께 구사할 수 있다.

지연전술의 단점은 상대방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원치 않을 때에만 지속적 사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당분간 이라크 안정에 전력투구하며 북한문제를 ‘관리’ 수준에서 다루겠지만, 2005년 전반기를 넘기면서부터는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부시 행정부의 자세가 보다 강경한 쪽으로 변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PSI, 북한인권법안 등 그동안 비축해둔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북한 압박에 본격적으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강경노선과 지연전술의 두 노선은 1차 북핵위기와 부시 집권 1기에 북한이 이미 사용했던 전술이다. 과거에 어느 정도 통했던 카드가 부시 2기에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단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변했으며, 11월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이 외교안보팀의 친정체제를 강화하며 일사불란한 외교를 펼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제 달라진 국제환경에 북한이 ‘적응과 변화의 외교’를 펼쳐야 할 때다.

한국의 외교적 노력

향후 미국과 북한의 선택을 조합해 보면 북핵 관련 시나리오를 상정해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조기 타결 시나리오, ‘그럭저럭 버티기’(muddling through) 시나리오, 긴장 고조 후 극적 타결, 파국 시나리오 등 세 갈래길이 가능하다. 첫 번째 조기 타결은 미국이 전술적 유연성을 보이고, 북한이 실용주의적 자세를 갖고 전략적 결단을 취했을 경우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럭저럭 버티기는 미국이 이라크 안정에 몰입하여 북핵문제를 당분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중국 또는 주변국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몸값을 올리려는 북한의 책략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전략으로 나올 경우 가능한 경우이다. 파국 시나리오는 미국의 강경노선과 북한의 강경노선이 충돌할 때 가능하다. 미국은 우선 북한의 태도 불변을 구실로 경제제재에 착수한 후 가능하면 군사적 수단까지 사용하는 경우다.
관건은 한반도의 안보불안이 고조되기 전에 북핵문제의 해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한국은 미국과 북한을 모두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미대선이 끝난 후 노무현 정부는 북핵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11월 5일 노무현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재선을 축하하는 전화통화에서 “북핵문제를 두 정상의 공동프로젝트로 해 빠른 시일내에 해결하자”고 제안한 바 있고, 12일 로스엔젤레스 연설에서 노대통령은 북핵보유 용납불가, 북한의 개혁, 개방 가속화 전망,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 대북 무력사용, 봉쇄정책 반대 등을 천명하였다. 한국 정부가 정권 교체를 통한 북핵문제 해결에 반대한다는 뜻을 미국측에 전한 것이다. 19일 반기문 외무-콜린 파월 국무의 회동에서 반장관은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축적인 창의성 발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11월 20일 칠레 산티아고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일단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북핵문제의 평화적, 외교적 해결에 동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미국은 6자회담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기본틀이라는 점과 주변국들이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했고, 한국은 평화적 해결과 한국의 주도적, 적극적 역할론을 개진하는 성과를 거뒀다. 주도적 역할론의 배후에는 특사 파견, 남북 정상회담의 개최 등 남북대화를 북핵 해결에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오는 18일로 금강산 관광이 6주년을 맞았지만 한국 국민들이 피부로 느낄 만큼 남북관계가 개선된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포용정책 속에서도 남북관계가 적대적 공존에서 안정된 평화적 공존으로 넘어가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남북관계와 북핵문제에서 북한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다. 2000년 말 미국과 대타협의 기회를 놓친 실수를 다시 범해서는 안 된다. 북한, 미국 양국이 모두 ‘한반도 비핵화’를 최종 목표로 표방하고 있으므로,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받아들이는 선택을 하고, 한국 또는 중국이 미국의 반대급부를 ‘보장’해 주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체면을 살려주는 주변국의 역할도 중요하다. 북한은 넓고 멀리 봐야 한다. 민주당 후보의 패배로 이제 페리 프로세스의 부활은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북한이 과거 데탕트에 적응하기 위해 대남 화해공세를 펼쳤고, 냉전의 해체에 적응하기 위해 UN 동시가입을 받아들였듯이 이제 북한은 탈탈냉전의 시기에 적응하기 위해 ‘한반도의 비핵화’를 받아들이는 ‘전략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승지(외교안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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