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테러 면죄"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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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이 테러 지원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리비아가 최근 로커비 사건 희생자 유가족에게 총 27억달러(약 3조5천1백억원)의 보상금을 주겠다고 제안한 데 대해 논란이 일고 있다.

로커비 사건 유가족을 대변하고 있는 짐 크라인들러 변호사는 28일 성명을 통해 "리비아측이 유가족 한 가족당 1천만달러(약 1백30억원)를 보상금으로 제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보상금은 유엔과 미국이 리비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했을 때 각각 40%, 나머지 20%는 미국이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빼줄 때 단계적으로 지불하겠다는 조건이 붙어 있다.

리비아측 제의를 유가족들이 받아들이면 1996년 리비아 정부를 상대로 제기된 이 소송은 마무리된다.

또 92년 4월 15일부터 리비아에 취해진 유엔 경제제재의 해제조건인 ▶유족에 대한 보상▶폭파책임 인정▶사건 관련 정보공개▶테러 공식 포기 등 네가지 중 하나가 충족되는 셈이다. 그러나 문제가 간단히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리비아 정부는 29일 공식 성명을 통해 "우리는 (보상금)합의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영국의 BBC방송은 리비아 정부가 부인한 것은 국내 정치적인 입장을 고려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법률가들은 형식상 보상금 제의는 리비아 정부의 위임을 받은 리비아 사업가와 법률회사가 한 것이기에 받아도 문제는 없을 것이란 관측이다.

일부 유가족의 격앙된 반응도 협상타결의 걸림돌이다.

당시 무남독녀를 잃은 유가족 수전 코언은 "돈으로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빠지겠다는 의도"라면서 "끔찍스럽고 메스꺼운 제안"이라고 격분했다고 CNN방송은 전했다.

리비아의 제의에 대해 미 정부는 일단 환영하면서도 신중한 입장이다. "돈으로 테러행위를 눈감아 주는 것 아니냐"는 여론이 일고 있어서다.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29일 "리비아의 제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한걸음"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리비아의 제의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고 여운을 남겼다.

◇로커비 사건=88년 12월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발생한 팬암기 103편 폭파사건을 일컫는다.

이 사건으로 2백70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미국은 이 참사를 "리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범죄"로 규정하고 유엔 차원의 강력한 경제제재를 가해 왔다.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한 리비아는 99년 4월 자국 용의자 2명을 유엔에 인도했고, 스코틀랜드 법정은 1명에게 유죄를, 다른 1명에겐 무죄를 선고했다.

유권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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