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의 마술사' 김벌래씨 父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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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초읽기에 들어간 월드컵 개막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부자(父子)가 있다.

개막 행사의 음향(音響)을 책임진 김태근(金泰槿·31·작곡가)씨,그리고 30일 밤 전야제의 음향과 효과를 지휘할 아버지 김평호(金平鎬·61)씨다.

김평호씨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개·폐회식 음향을 총괄했던 국내 음향분야 대부 김벌래(예명), 바로 그 사람이다.

전세계 20억 축구팬들의 눈과 귀를 붙잡을 이틀간의 큰 행사를 아버지와 릴레이로 떠맡은 태근씨에게 요즘의 1분1초는 긴장과 두근거림의 연속이다.

행사에 들어갈 음악을 편집하고,효과음과 비트를 집어넣고, 또 이를 수십번씩 반복하며 확인하는 일로 밤샘 작업을 계속해온 지 한달. 3월부터 맡았던 순천향대 예술학부의 무용음악 강의는 두달 전 이미 중단했다. 매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작업실과 마포구 상암동의 경기장을 오가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피곤한 생활이지만 공연을 펼칠 수천명 스태프들이 그가 만든 신호, 그가 트는 음악에 맞춰 움직일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29일 삼성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는 스스로 긴장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아버지의 명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아버지 김벌래씨는 태근씨로 하여금 '소리 인생'의 길을 걷게 한 사람이다.

합성음으로 콜라병 뚜껑을 따는 소리를 만들어냈던 아버지에게서 태근씨는 유별난 음감(音感)을 물려받았고 어려서부터 풍성한 소리들을 접하며 자랐다.

"어릴적 집안에선 소리가 그치지 않았어요. 과자 씹는 소리가 필요할 때면 아버지께선 저녁 때 과자를 한보따리 사오셨지요. 저와 동생은 밤늦도록 과자를 씹어야 했습니다. 아버지의 감각에 맞는 '아삭'소리 하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였죠. 값 비싼 녹음 장비가 집에 다양하게 있었던 것도 작곡을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됐어요."

그런 환경 때문이었을까. 金씨는 88년 서울 영일고 2년 때 일찌감치 파카 크리스털 제품 광고음악으로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받는 재능을 보였다.

이어 중앙대 작곡과를 졸업한 뒤 수십편의 연극·영화·광고의 음악을 맡으며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해왔다. 지난해 말부터 장기 공연 중인 인기 연극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의 음악이 그의 최근 작품이다.

한편 태근씨의 동생 태완(泰完·30·국악 작곡가)씨도 30일 아버지와 함께 전야제 음향 일을 한다. 3부자가 모두 월드컵에 출전한 셈이다. 홍익대·서울예전·경희대대학원에서 후진들을 가르치고 있는 김벌래씨는 "두 아들과 함께 맡은 이번 월드컵을 신바람나게 치르겠다"고 말했고, 태근씨는 "아버지 못잖은 솜씨를 보이겠다"고 했다.

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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