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회담 회의록 공개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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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햇볕정책'이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때에 '통일소란'이 벌어졌다. 이회창(會昌)대통령 후보가 집권하면 평양 공동선언 제2항을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이라고 지난 22일 관훈클럽 토론에서 말한 것이 불씨가 됐다.

연합·연방 말 안된다

청와대는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 그 제2항에 대해 북한이 우리측 통일방안에 가까이 다가 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후보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했고, 민주당은 후보를 '냉전논리'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평양은 평화통일 방안으로 '연방제밖에 없다'는 소리를 내고 있다.

도대체 '연합'은 무엇이고 '연방'은 뭐기에 옥신각신하는가? 평양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로 해명되지 않고는 두고두고 시끄러울 것 같다. 특히 남과 북의 양김(金)이 세번에 걸쳐 모두 1백20분간 단독으로 만났을 때 이 부분에 관해 서로 얘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진솔하게 밝혀야 의혹과 억측의 꼬리가 길어지지 않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한 국가인 대한민국이 가장 실패한 북의 통치집단과 결합하기 위해 연합이든 연방이든 통일을 위해 나라의 이름을 바꾸고 자유민주주의를 타협시킨다면 분명히 그 정체성(正體性) 변조(變造)에 해당하므로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다음 몇가지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남측의 연합제안'이라는 것은 남측이 국민적 합의에 의해 통일방안으로 확정한 한국의 국론인가, 그리고 그것을 위해 김대중 정부는 북측과 협상하도록 국민적 위임을 받았는가이다.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국론분열로 남남갈등을 빚어낸 것이다. 입헌국가 한국에서는 대통령이라도 국민의 권리의무를 자의적으로 주무를 수 없을진대 하물며 국가의 정체성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음은 물론이다. 역대 정권이 표방한 통일방안은 국책으로 확정될 만큼 국법상의 정당한 절차를 밟은 적이 없다.'남측의 연합제안'이라고 북측에 내놓기 위해서는 사전에 또는 사후라도 최소한 국회동의는 받았어야 했다. 한국은 '연합제안'을 결정적 통일방안으로 채택한 바 없다.

둘째, 평양선언 2항에서 양측의 소위 통일방안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는데 무슨 공통성인가이다. 국제법상 연합은 국가간의 '친선'협의단체로 국가가 아니다. 옛 소련의 1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독립국가연합이 그 예로 그 자체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연방은 미국이나 독일같이 하나의 완전한 통일주권국가로서 자신의 이름 아래 선전포고와 강화를 하고 조약을 체결하며 대사를 파견한다. 그렇게 하는 데에는 높고 낮은 단계가 있을 수 없다. 평양은 '낮은 단계의 연방'이란 외교·군사에 관한 권한을 지방(支邦)에 부여하는 것이라는 소리를 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연방이 아니다. '공통성'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한 것은 남한의 국가보안법 폐지·주한미군 철수 등 북쪽의 연방제 전제조건에 대한 남쪽의 수락을 은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통일 조급증서 벗어나길

셋째, 북쪽 정세로 보아 지금이 서로가 통일방안을 논의할 만한 형국인가이다. 1백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내고 아직도 수많은 주민을 굶어죽게 하며 수십만명으로 알려진 탈북자들을 방황하게 하고 있는 평양의 집권세력을 상대로 연합이든 연방이든지를 구성하는 것이 그렇게 급한가? 당장 급한 것은 굶주리고 헤매는 민족을 구제하는 일이다. 남북간의 엄청난 격차를 무시하고 1대 1로 연합이나 연방을 구성해 '민족독재'라도 좋으니 통일이 다급하다고 우겨대는 것보다 더한 반역은 없다. 민족이 국가보다 앞서고 통일이 자유보다 중요하다는 망상이 한국의 정체성 유지를 소모적 논쟁으로 만든다.

통일은 어떤 방안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서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통일방안이 없었고 통일의 노래를 시끄럽게 부르지 않았다. 북한의 붕괴를 '바란다' 또는 '바라지 않는다'는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국론의 분열과 국력의 낭비 및 국익의 왜곡 없이-조용한 통일외교를 분별 있게 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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