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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누구인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임권택(66) 감독은 1936년 전남 장성의 부유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부친이 좌익 활동에 가담하면서 가세가 크게 기울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맞게 된다. 1950년 광주 소재의 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집안 형편상 중도에 그만둔다.

6·25 혼란기에 목포·부산 등지를 떠돌던 그는 서울에서 내려온 신발장수들의 심부름을 해주던 인연으로 상경한다. 이 중 한 신발장수가 영화업에 투자하면서 그의 권유로 스무살 무렵 영화계에 발을 들였다. 허드렛일부터 시작한 그는 정창화 감독의 신임을 얻어 연출부 일을 배웠고 마침내 62년 '두만강아 잘있거라'로 데뷔했다. 영화 외에 별다른 오락이 없던 시절이라 임감독은 1년에 대여섯 편씩 영화사가 요구하는 대로 '기계로 찍어내듯' 왕성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전쟁과 여교사'(66년) '잡초'(73년)'낙동강은 흐르는가'(76년)'깃발없는 기수'(79년) 등의 대표작을 포함해 70년대말까지 만든 영화가 80여편이 됐다.

임감독은 80년 '짝코'를 계기로 자기 색깔이 강한 영화를 만들게 된다. 당시엔 외국영화 수입 쿼터제가 시행됐다.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면 해당 영화사에 쿼터수를 늘려주었기 때문에 영화사들이 수준 높은 작품을 간혹 요구했던 것이다.

81년 '만다라', 85년엔'길소뜸'이 각각 베를린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마침내 87년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수상했다. 이후 '아다다'(88년)'아제 아제 바라아제'(89년) '서편제'(92년)'태백산맥'(94년)'축제'(97년)'춘향뎐'(2000년) 등 화제작을 잇따라 내놓았다.

일본의 평론가 사토 다다오(佐藤忠男)가 "임감독은 삶의 참된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듯이 개인적인 한과 고통을 한민족의 정서로 녹여낸 점에 세계 영화인들이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임감독은 영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97년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98년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구로자와상을 수상했다. 79년 결혼한 배우출신 채혜숙(예명 채령)씨와의 사이에 2남이 있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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