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영상미" 한국화에 취한 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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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제55회 칸 국제영화제가 26일(현지 시간) 폐막했다. 하지만 칸은 오랫 동안 '취화선'을 기억할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춘향뎐'에 이어 한국 영화로는 두번째로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취화선'이 25일 오후 10시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공식 상영됐다. 칸의 유명한 전통에 따라 이날 남성은 검은색 턱시도를, 여성은 드레스를 입고 입장했다.

임권택 감독을 비롯해 주연 최민식·안성기씨와 제작자인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도 검은 턱시도를 말쑥하게 차려 입고 붉은 카펫 위를 걸어 입장하자 외신 기자들의 플래시가 일제히 터졌다. 특히 영화배우 출신인 부인 채령씨를 동반한 임감독에게 눈길이 집중됐다. 그와 친분이 있는 인도네시아의 여배우이자 심사위원인 크리스틴 하킴이 극장 앞에서 이들을 반갑게 맞았으며, 관객 1천5백여명은 관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냈다.

두 시간에 걸친 상영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관객들은 '술과 여자에 취한' 조선 후기 천재화가 장승업의 기행(奇行)과 능란한 붓놀림을 숨죽여 지켜봤다.

그림을 찢고 또 찢기를 반복하다 잠이 든 장승업이 화선지 더미를 헤치고 일어나 물구나무를 서는 장면, 양반 행차 때 길을 비키지 않는다고 뭇매를 맞은 그에게 시동이 갓 돌 지난 아이의 오줌을 권하는 장면 등에서는 가벼운 웃음이 일었다. 또 그가 도자기 가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불현듯 가마 속으로 사라지는 결말 부분에선 뜻밖의 충격을 받았는지 장내가 술렁이기도 했다.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었다. 프랑스의 영화전문 사이트인 '플럭추아'(fluctuat.net)의 기자는 "화가에게 반복은 곧 죽음이라며 일평생을 자신과 싸웠던 장승업이 불가마 안으로 뛰어들어 생을 마치는 결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평했다. 니스에서 온 로렌스 기게노는 "한국의 사계를 골고루 담은 아름다운 영상이 특히 좋았다"며 "물론 대역을 썼겠지만 최민식이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 실감났다"고 말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제작진을 치하하는 기립 박수가 7분간 이어졌다. 그러나 외국인에겐 생소한 한국화 이론이나 한국 근대사를 설명하는 부분에선 다소 지루했던지 자리를 뜨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이날 오후 열린 기자 회견에는 약 30명의 외국 기자가 참석했다. 루마니아 기자가 "장승업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데 그의 죽음을 불가사의하게 처리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임감독은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조선시대 4대 화가의 반열에 오르기까지 그의 노력과 역정을 생각해 보면 그가 나이 들어서도 결코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치열하게 거듭나려 했을 것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기자 회견의 사회는 '취화선'의 판권을 구입한 프랑스의 메이저 배급사 파테 프랑스의 고문 피에르 뤼시엥이 맡았다.

그는 한국영화에 대한 지지의 뜻으로 '스크린 쿼터 문화연대'가 새겨진 오렌지색 티셔츠를 입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임감독은 그에게 "왜 취화선 티셔츠를 입고 나오지 않았느냐. 서운하다"고 농담을 던져 회견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취화선'은 기자 시사회가 영화제 종반인 24일에 열려 손해를 본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경쟁작이 이미 공개되면서 언론의 평가와 관객의 입소문을 타고 화제를 뿌렸던 것에 비하면 큰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이다.

그러나 영화제 동안 프랑스의 유력지 르 몽드·르 피가로 등 40군데가 넘는 해외 언론에서 임감독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는 등 임감독이 국제적 감독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며 한국영화를 알리는 첨병의 역할을 단단히 해낸 것으로 보인다. 올 칸에서 한국영화가 거둔 가장 큰 수확으로 평가된다.

칸=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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