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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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郞·1865~1950)는 일본 물리학계의 비조(鼻祖)로 불릴 만한 인물이다. 한때 "수은을 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고 주장했고, 일제 말기 군부가 주도한 원자폭탄 제조 연구에 참여하는 등 오점도 남겼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초 톰슨·러더포드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다. 그가 1903년 발표한 '토성형 원자모형'은 당시 핵물리학의 첨단 이론이었다.

그런 나가오카도 대학 시절엔 서구문명에 대한 심한 열등감에 빠졌던 모양이다. 1882년 그가 도쿄(東京)대 이학부에 입학할 당시 교수진은 거의 전원이 메이지 정부가 모셔들인 서양인이었다. 일본이 마른 솜인 양 서구문명을 정신없이 흡수하던 시대였다.

수업은 영어나 독일어로 진행됐다. 물리학 강의를 아무리 들어도 온통 서양학자 이름뿐이었다. 나가오카는 "원래 동양인에게는 물리학 재능이 없나보다. 그럼 내게도 장래가 없지 않은가"라는 회의에 빠져 대학을 휴학하고 말았다.

휴학 중 중국 문헌을 샅샅이 뒤진 그는 고대 중국이 나침반이나 공명현상, 수학의 미분(微分)개념 등을 이미 활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용기를 되찾았다. 1년 뒤 복학했고 독일유학을 거쳐 일류학자로 성장했다. 1949년 일본 최초로 노벨상(물리학상)을 받은 유가와 히데키(湯川秀樹·1907~1981)를 수상후보로 적극 추천한 사람도 나가오카였다.

유학 시절 나가오카는 고국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백인이 모든 분야에서 우월한 것은 아닐 테니까 10년이나 20년 후엔 그들을 쳐 이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내가 죽어 지옥에 가서 자손들이 백인에게 승리를 거두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본다면 재미있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19세기 후반의 일본이 서양학자들을 대거 초빙하고 나가오카 같은 '사무라이(무사) 유학생'들을 바깥세상에 보내 국가중흥을 꾀한 것에 비하면 당시 조선·대한제국의 정세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기만 하다. 올해 2학기부터 1억원 가까운 연봉을 받는 외국인 초빙교수 1백3명이 국립대 강단에 선다는 소식이다. 국내엔 이미 1천2백여명의 외국인 교수가 있다. 백수십년 전 상황과 나란히 비교할 일은 아니겠지만,국내외 학자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 필요성은 지금도 그때 못지 않다고 본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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