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세기 가톨릭 대표 신학자 카를 라너 신부를 돌아보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종교에는 묘한 영역이 있다. 다름 아닌 학문이다. 학문의 영토에선 문자를 연구한다. 그래서 늘 ‘요주의’ 팻말이 붙는다. 종교의 문자를 쫓다가 자칫 종교의 생명을 놓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달을 보라고 했더니,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본다”는 중국 혜능(638~713) 대사의 지적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도 바울도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spirit)은 사람을 살린다” (고린도 후서 3장 6절)고 일갈했다. 진리는 책 속의 문자가 아니라, 눈 앞의 생명에 있다는 얘기다. 이런 맥락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다. 20세기 가톨릭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히는 카를 라너(Karl Rahner·1904~84)다. 독일 출신 예수회 신부이기도 했던 그는 ‘기도하는 신학자’로 통했다. 기도는 생명, 신학은 학문을 뜻한다. 그는 학문의 영토에서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놓치지 않았던 신학자다. 그래서 그의 기도, 그의 고백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등대가 지금도 켜져 있다.

20세기 대표적 신학자인 독일의 카를 라너 신부. 그는 평소 “형제 여러분, 조용한 말로 끝냅시다. 우리의 시끄럽고 약한 인간의 말 때문에 하느님의 고요하되 힘찬 은총의 말씀이 들리지 않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설교했다. [베네딕도미디어 제공]

베네딕도미디어에서 라너 신부의 일생과 신앙고백을 다룬 DVD ‘칼 라너’(34분·1만5000원)를 출시했다. 독일에서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에는 ‘하느님과 대화하는 신학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국내에서도 신학자들 사이에서나 통용되던 이름 ‘카를 라너’를 일반인이 만나기에 좋은 징검다리다. 카를 라너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나는 기도하기 때문에 믿는다.(Ich glaube, weil ich bete.)” 이 대목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ch denke, also bin ich)”와 비교된다. 결국 카를 라너는 ‘생각하는 나’보다 ‘기도하는 나’에 더 방점을 찍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생각하는 나, 존재하는 나’ 이전에 이미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나의 생각’이 아니라 ‘나의 기도’를 통해 진리를 찾고자 했다. 카를 라너가 그토록 강조했던 ‘기도’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누군가 물었다. “라너 신부님, 기도를 하십니까?” 그는 먼저 “자신의 삶 속에서 겪는 크고 작은 사건을 보라”고 답했다. 그리고 세 가지를 전제했다.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형언할 수 없이 거룩한 사랑의 신비에 얼마나 인접해 있는지를 정작 알아차린다면, 그리고 마치 이 신비에 나를 맡기듯이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자세를 취한다면, 내가 이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너 신부의 이 말은 ‘무엇이 진짜 기도인가’ ‘내가 진정 기도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신앙의 첫 단추를 묵상케 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마디 덧붙였다.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제가) 기도하고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행복만을 위해 목청을 높이고, 그걸 기도라고 부르는 오늘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대목이다. 라너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의 고문으로도 활약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교파뿐만 아니라 타종교와 대화·교류를 통해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취했다. 결국 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물을 도출하는 ‘열쇠 중의 열쇠’ 역할을 했다. 사실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년)는 ‘세상(근대적 사상)과의 대결’이었다. 그래서 교황의 무류성(무오류성)을 신조로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상과의 조화’를 지향했다. 그 나침반을 제시한 핵심 인물이 바로 라너 신부였다. 뮌헨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던 그는 ‘자신의 앎’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참으로 하느님, 알기만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알면서 사랑하는 경험을 통해서라야 사물의 마음에 접하게 됩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출판된 라너 신부의 책은 무려 4000종이 넘는다. 그럼에도 그는 ‘나의 앎’보다 ‘사랑의 경험’을 더 중시했다. 이처럼 그는 신학자 이전에 수도자였다. 그래서 말라버린 문자가 아닌 숨 쉬는 생명 속으로 녹아 들고자 했다. 라너 신부는 절제의 생활이 몸에 뱄다. 과식하는 법이 없었고, 지나친 단식도 하지 않았다. 또 음악이나 자연에 대해 매우 깊이 느끼지 못하는 점을 무척 애석하게 여겼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맞게 된다면?”이라면 질문을 받고서 이렇게 말했다. “하느님, 하느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아버지, 당신 손에 내 영을 맡깁니다!” 그건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던졌던 답이기도 했다. 이처럼 라너 신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의 발자국 위에 자신의 걸음을 포개고자 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의 기도, 그의 인터뷰, 그의 일생이 던져주는 메아리는 지금도 가슴을 적신다. 문의 베네딕도미디어 02-727-2143, 054-971-0630. 홈페이지:http://www.benedictmedia.co.kr 백성호 기자 ◆카를 라너=독일 출신의 가톨릭 신학자. 고교 졸업 직후 예수회에 들어가 사제가 됐다. 하이데거로부터 서양철학을 배운 그는 인스부르크 대학, 뮌헨 대학 등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과물 도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계 각국의 언어로 출간된 저서만 4000종이 넘는다. 저서로는 『말씀의 청자』 『누가 너의 형제냐?』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사명과 은혜』 등이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됐다. 1959년 1월 가톨릭 교회의 쇄신(현대화)과 신·구교의 일치에 대한 내용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이 공의회를 통해 1054년 동방교회(정교회)에 대해 내렸던 파문을 1000년 만에 서로 취소하는 결정도 내려졌다. 세계 가톨릭 국가들이 전례에서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덕분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