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9년째 하락… 디플레 중병 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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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일본의 물가 하락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수십년간 고비용·고물가의 사슬에 묶여 있던 일본으로서는 물가 하락을 반겨야 마땅하다. 그러나 지금 일본의 물가 하락은 예사롭지 않다.

소비자들은 "앞으로 물가가 더 떨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기업이나 정부는 "1930년대 대공황과 같은 상황에 일본이 빠져드는 게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인플레이션보다 더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지속적 물가 하락)의 늪에서 헤매게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일본의 전체 물가(국내총생산 디플레이터)가 하락하기 시작한 것은 94년. 올해로 9년째 8% 넘게 떨어졌음에도 하락세는 여전하다.

그림에서 보듯 디플레의 악순환 속에서는 잘 나가던 기업도 몸집 줄이기에 나설 수밖에 없다.

가계도 디플레 태풍의 영향권 안에 들기는 마찬가지다.

물가가 더 떨어져 불황이 깊어지면 소득도 따라서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직 물가 하락이 본격적인 소득 감소로 나타나진 않았지만, 실업률은 이미 5.3%로 2차대전 직후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가계 소비도 약간씩이나마 올해로 6년째 줄어들고 있다.

디플레로 인한 '내부로부터의 붕괴'가 더 이상 일본인들의 엄살이나 과장만은 아닌 것이다. 디플레 대책을 놓고 우왕좌왕하는 일본 정부 부처들은 불안감을 더 키우고 있다.

98년부터 제로 금리를 실시해 보고, 또 1백20조엔의 돈을 부어 경기의 불을 지펴봤다.그러나 그런 노력을 비웃듯 경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금융은 금리라는 정책수단만 허공에 날렸고, 재정은 국내총생산(GDP)의 1백40%에 이르는 국가채무만 떠안게 됐다.

'디플레와의 전쟁'에 나가 싸울 무기도 의지도 다 떨어진 것이다.

손발이 묶인 일본 정부는 98년 때처럼 미국의 강한 경기회복이라는 떡이 하늘에서 떨어지기만 고대하고 있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原英資)게이오대 교수는 "정부는 개혁을 통한 위기극복의 비전도 의지도 없다""이제 위기는 시작일 뿐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리고 있다.

일본 경기의 조기 회복을 점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다. 일부 제조업 부문에서 재고가 바닥에 이르고 미국에 대한 수출 경기가 살아나고 있음을 두고서다.

그러나 앞으로 부실채권 떨어내기와 구조조정 노력이 본격화하면 경기가 어려워질 것은 불보듯 뻔하다.

시노하라 하지메(篠原興) 예금보험기구(DIC)이사는 "앞으로 1년 정도는 제로 성장을 보이다가, 2년째에는 약간 회복세를 보이면서 물가하락이 멈추고, 3년째가 되면 성장이 1% 정도로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런데 나는 지난 10년 동안 이 '경기 회복 3년설'을 되뇌어 왔다"고 자조(自嘲)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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