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홍콩>잇단 자살 사건… "절망의 生에 희망을" 불붙은'생명존중'운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홍콩에 수많은 '생명천사(Life Angel)'가 날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고 터지는 자살사건을 막기 위해 6천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대대적인 생명존중 캠페인에 나선 것이다.

홍콩에선 지난해 9백8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최근에는 집안에 숯불을 피워 놓고 죄없는 어린 자녀와 함께 죽는 동반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달 20일엔 빚을 못갚은 가정주부가 아홉살 난 아들과, 다음날엔 남편의 외도를 의심한 여성이 딸·아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올들어서만 유사한 동반자살 사건이 10여건 발생했다.

지난 11일 오후 홍콩의 주룽(九龍)반도 야우마테이(油麻地)에 있는 루터란 교회 2층 대강당.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부터 고교생까지 5백여명이 빼곡히 강당을 메우고 있다. 생명천사가 되기 위한 교육과정을 이수 중인 사람들이다.

캠페인을 주도하고 있는 기독교 신의회의 우청소퐁(胡鄭素方·40)사회복무부 주임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관심과 희망을 주는 것이 생명천사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그는 "잇따른 가족 동반자살에 충격을 받아 이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네 시간의 강의시간 내내 대형 스크린에는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생명을 존중하자(關心別人 珍惜生命)'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강사들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다한다' '다른 사람과 희로애락을 공유한다' '날마다 스스로를 칭찬한다'는 행동요령을 가르쳤다.

자원자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옆 사람과 조(組)를 짜 대화훈련도 했다. 강의를 듣던 천임(陳炎·63·전직 교사)은 "가정과 학교·직장 내 대화단절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생명천사 운동은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남의 일에 눈·귀·입을 막고 산다는 홍콩 사회에선 뜻밖의 현상이다. 자원자만 해도 종교단체에 3천여명, 다른 6개단체에 3천여명이 몰렸다. 당초 목표로 잡았던 1천명보다 다섯배나 많은 숫자다. 활동 기금 목표액도 40만홍콩달러(약 6천8백만원)에서 2백만홍콩달러로 높여 잡았다. 운동본부는 '생명의 전화' 핫라인을 가동하는 한편 곧 '생명존중 40만명 서명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생명천사 대열에는 한 때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다. 피터(47)는 한 때 1천6백만홍콩달러(약 28억원)의 재산을 모은 외환 브로커였다. 부인의 생일 저녁식사 비용으로 2백만원을 쓴 일도 있다.

하지만 금융위기의 태풍 속에 재산을 몽땅 날리고 파산·실업·이혼의 수순을 밟아 노숙자로 전락했다.지금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실업자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러나 반론도 있다. 홍콩의 한 전문가는 "1년간 실업상태에 있는 사람이 자살할 확률은 취업자보다 26배나 높다"며 고(高)실업률(현재 7%)을 걱정한다. 6백70만명 인구 중 실업자만 24만명에 달하는 현실에서 캠페인만으로 자살을 막을 수 있겠느냐는 걱정이다.

홍콩=이양수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