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조깅 코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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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7일 오전 7시30분이 지나자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서울시내 한 호텔의 헬스 클럽으로 성큼 들어섰다. 올해 77세의 나이에도 허리가 꼿꼿했다. 그는 카운터에 앉아 있다가 황급히 일어서는 여종업원들에게 악수도 청했다. 경호원 두명이 매우 조심스럽게 그의 앞뒤를 지켰다. 반바지와 반소매 티셔츠 차림을 한 그는 혈색 좋은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 가운데 자전거 타기를 고른 다음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책을 펼쳐 읽으면서 빠른 속도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며 땀에 젖어 있는 10여명의 한국 비즈니스맨들은 그들 사이에 끼여 있는 이 키큰 외국인이 전직 미국 대통령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20분쯤 흘러 그는 자전거에서 내렸다. 책을 덮은 다음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 두었던 수건으로 그가 앉았던 안장을 몇번인가 훔쳤다. 다시 마룻바닥에 흘러내린 몇방울의 땀도 닦아냈다. 종업원들이 달려오기 전의 일이었다.

그가 1992년 당시 미국 대통령으로 일본 방문 중 만찬석상에서 나무 기둥처럼 쓰러진 적이 있었다. 그는 이보다 1년 앞선 해에도 캠프데이비드 별장에서 조깅 중에 심장발작을 일으켜 졸도했다. 그때마다 의사들은 나이에 맞지않는 격렬한 운동을 하지 말도록 권고했을 뿐 몸에 이상은 없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국제회의 참석차 서울에 다시 나타난 그의 모습은 매우 건강해 보인다. 그는 이번주 서울에 머무는 며칠 동안 호텔 안에서 이동하거나 차에 오르내릴 때도 손에 책이 들려 있는 것이 목격됐다.

그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었던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도 공식일정이 끝나면 독서로 많은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헬스클럽을 이용하는 부시 전 대통령과 달리 자신의 방에서 자전거 타기를 즐겼다.

월드컵 경기를 앞두고 수많은 국제 세미나와 각종 회의에 참석할 해외 저명인사들이 벌써부터 몇백명씩 몰려들고 있다. 청와대 부근을 산책하면서 책을 읽는 외국인이 늘어났다. 서울 강남구가 뒤늦게 외국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조깅코스를 개발했다. 그러나 해외 주요 도시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는 시설이다. 외국 정상들이건 유명 기업의 CEO들이건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한국 체재 중에 스트레스를 풀면서 각자의 기호에 따라 스포츠와 레저를 즐길 수 있는 환경 조성을 생각할 때가 됐다.

최철주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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