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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17회 정리해고와 현대차 파업] 첫 정리해고 여당 개입으로 '시늉'에 그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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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현대자동차 사태는 더 끌기 어렵습니다. 이번에 정리해고가 안되면 한국은 아직도 기업이 노동자를 해고할 자유가 없는 나라로 국제사회에 비춰질 겁니다. 그랬다간 국가 신용등급이 더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1998년 8월 18일 오후,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실.

이기호 노동부장관(현 청와대 경제복지노동특보)의 보고였다. 당시 현대차는 재벌기업 중 최초로 1천5백여명의 정리해고를 단행했고, 이에 맞서 2만8천여 노조원은 30일째 공장을 점거하며 농성 중이었다.

이기호는 전날 밤 울산 현대차 공장으로 달려가 중재에 나섰지만 실패하고 이날 상경해 당정협의에 참석한 것이었다.

국민회의는 이 자리에서 노사정위원회와의 합동중재단 파견을 결정한다.

중재단 구상은 노무현 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에게서 나왔다. 노무현 측근의 회고.

"부총재는 자기가 보기엔 분명히 해결할 수 있는데, 파국으로 치닫는다며 답답해했다. 그래서 당정협의 전에 미리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에게 중재단을 파견하자고 건의했었다."

정부 공권력 투입 꺼려

그러나 주무부처인 노동부의 입장은 좀 달랐다.

이기호의 회고.

"정부는 노동법상 노사협상에 개입할 수 있지만 정치권은 아니었다. 조세형 대행에게 '당은 2선으로 물러서 달라'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당시 현대차 파업에 정부는 물론 정치권까지 말려들어야 했을까.

문제는 정리해고였다. 경영상 긴박한 상황이면 기업이 합법적으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도록 한 정리해고제는 당시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재는 잣대로 여겨졌다. 정리해고제는 외환위기가 온 97년말 국제사회가 한국 정부에 강력히 요구한 것이었다.

특히 미국은 친(親)노동자 성향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과연 정리해고제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며 일산 자택으로 립튼 차관보를 보내 '면접시험'을 치르기도 했다(1월3일자 국민의 정부 경제실록 제1회 참조).

정리해고제는 98년 2월 노사정위원회의 합의를 거쳐 법제화됐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재벌그룹으론 처음으로 현대차가 정리해고를 단행하자 이것이 한국에서 정리해고제가 뿌리내릴 수 있는지를 재는 본격 시험대가 된 것이었다.

재계는 극심한 경영난을 이유로, 노동계는 대규모 실업사태를 막기 위해 한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며 전면전에 나섰다. 급기야 정부는 물론 정치권까지 통째로 전선에 휘말리게 됐다.

조규향 당시 청와대 사회복지수석(현 서울디지털대학교 총장)의 회고.

"현대차 사태를 놓고 거의 매일 청와대 별관에서 관계장관 회의를 했다. 정리해고를 보장하되 불법 파업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게 대세였다. 대통령은 '원칙대로 하라'고 했다."

18일 노무현이 합동중재단과 함께 울산 현대차 공장을 찾았을 때는 공권력 투입 임박설이 파다한 시점이었다. 노무현은 당장 정리해고를 받으라고 김광식 당시 현대차 노조위원장을 압박했다.

"나는 당신들 편을 들어주려고 온 거 아닙니다. 정리해고를 받으세요. 규모를 최소화해서라도."(노무현)

"지난번에 이기호 장관도 '국제사회가 보고 있으니 상징적으로 조금만이라도 정리해고를 받으라'고 했지만 거절했습니다."(김광식)

"그동안 내가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땀을 흘린 것 알지 않습니까. 정리해고 안받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공권력이 투입되면 피해가 너무 커집니다."

"근무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 등을 통해 정리해고를 피할 수 있습니다."

노무현은 회사측도 강하게 압박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현대차 관계자의 회고.

"노무현 부총재는 첫 대면에서 '정리해고를 안할 수 없느냐. 국민의 정부에선 옛날 식으로 노사분규를 해결하지 않는다. 공권력 투입을 기대하지 말라'고 말했다. 노조가 공장을 불법 점거하고 있는데 아무런 조치를 안하면 정부 역할은 뭐냐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

중재단이 나섰지만 노사 합의는 좀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자 재계와 경제부처에선 정치권이 개입하는 바람에 사태 해결이 지연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중재단은 반전(反轉)이 필요했고, 노무현은 21일 새벽 노조 집행부를 따로 만났다.

"이렇게 버티기만 하면 중재단도 어쩔 수가 없어요. 당과 청와대에서 철수 지시가 내려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철수하면 다음은 공권력 투입입니다. 큰 틀에서 (노조가) 정리해고를 받는다는 발표라도 해야 할 상황이오."

노조의 동의를 얻어냈다고 판단한 중재단은 몇시간 뒤 "노조가 정리해고를 비롯해 중재안을 전반적으로 수용한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격 발표한다.

중재안의 골자는 1천5백여명이던 정리해고 규모를 2백50~3백명으로 줄이고 ▶고용안정기금 설치·운영▶노조 집행부에 대한 고소·고발과 손해배상소송 철회 등이었다. 이러자 현대차측은 물론 재계가 발끈했다. 현대차는 중재안이 "회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노조 편향적"이라고 비난했다. 재계는 즉각 전경련·대한상의·무역협회·중소기협중앙회·경영자총협회 등 경제 5단체장 명의로 중재단 활동에 반대하는 공동 성명을 냈다.

'노조의 불법파업에 대한 공권력 투입의 부담 때문에 시작된 중재단의 개입이 타결만 중시한 채 원칙을 무시한 합의를 강제하는 것은 또 다른 불법 쟁의를 유발시킬 가능성이 크다….'

DJ도 이런 재계의 반발을 무시할 수 없었다. DJ는 이날 이강래 정무수석을 불렀다.

"이수석, 공권력을 투입해서라도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 아니오?"

"그랬다간 큰 불상사가 납니다. 대화로 해결할 가능성이 있으니 기다려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강래의 회고.

"당시 대통령께는 다른 채널로 현대차 사태를 빨리 풀어야 한다는 압력이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공권력이 투입되면 대통령이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칫 노동계를 탄압하는 대통령으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공권력 투입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때 정작 울산에선 중재단이 사측을 계속 압박하고 있었다. "노조가 중재안을 수용했으므로 이제 공은 회사측으로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사측은 22일 다시 협상장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현대차 관계자의 회고.

"회사는 장기 불법 파업으로 죽을 지경인데 사태 해결을 위해 공권력이 투입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힘이 느껴졌다. 회사로선 중재안을 받는 것밖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결국 사측은 정리해고 인원을 중재안에 맞춰 2백77명으로 대폭 줄여 제시했다. 이렇게 해서 8월 23일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 쟁점은 거의 해소됐다. 그러나 노사는 고발 철회 등 일부 쟁점을 놓고 여전히 맞서 최종 합의를 거부했다. 그러자 23일 오전 중재단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며 울산 코리아나 호텔로 철수한다. 중재단의 철수는 노사 양쪽에 압박이 됐다.

김광식의 회고.

"자기네가 실패하면 공권력 투입밖에 없다고 말해왔던 중재단이 철수하고 나니 올 때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했고, 공권력 투입시 노조원들이 볼 피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밤 11시30분. 정몽규 회장, 김광식 위원장, 이기호 장관이 다시 협상장에 모였다.

새벽 2시가 넘어서면서 쟁점들이 하나하나 타결되기 시작했다. 정리해고는 2백77명으로 확정하되 ▶1천2백61명은 1년6개월 무급휴직▶손해배상소송 취하▶2년간 정리해고 자제 등이 최종 합의 내용이었다.

정리해고자들에게도 별도의 위로금으로 7~9개월의 임금을 지급키로 했다. 정리해고자의 절반인 1백34명이 '식당 아줌마'였다. 대신 식당 아줌마를 재고용하기 위해 회사가 운영하던 식당을 노조가 맡기로 별도 합의했다. 당시 정리해고자 및 무급휴직자들은 그 뒤 경기가 살아나면서 모두 복직됐다.

정리해고자 대폭 줄어

협상이 최종 타결된 24일 오전 8시, 이기호는 DJ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님, 잘 해결됐습니다."

"현대차가 정리해고한 인원이 2백77명뿐으로 돼 있는데 희망퇴직 등을 합치면 1만여명을 구조조정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실을 외신에 제대로 알리세요."

DJ는 당시 현대차를 둘러싼 국내외 언론의 부정적 보도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었다. 실제 이날 재계와 외국 투자자들은 현대차 합의안을 놓고 '정치권의 개입으로 정리해고가 사실상 저지된 나쁜 선례'라고 비판했다.

같은 날 청와대 출입기자 오찬 간담회. DJ는 정치권의 '과잉개입'을 질책했다.

"노조가 정리해고를 받아들인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정치권이 지나치게 개입한 점은 유감스러운 일로, 앞으로 시정돼야 할 것이다."

이때 DJ는 노동계든 재계든 어느 한쪽 편을 들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다시 조규향의 회고.

"다른 사업장에서도 파업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인데, 대통령 입장에서 정치권 중재로 현대차 사태가 해결된 것을 잘했다고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국제사회가 지켜보고 있었고, 구조조정은 계속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열흘 뒤인 9월 3일 새벽 6시.

아산 사업장 등 전국의 만도기계 7개 공장에 경찰 1만4천여명이 투입됐다. 만도기계 노조는 당시 회사측의 정리해고 방침에 맞서 18일째 파업 중이었다.

이것이 DJ정부 출범 후 노조파업에 대한 첫 공권력 투입이었다. 똑같이 정리해고를 놓고 파업한 현대차와 만도기계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열흘새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청와대 관계자의 증언.

"현대차와 만도기계는 많이 달랐다. 규모도 차이났고, 당시 만도기계는 외자유치를 추진 중이었다. 무엇보다 만도기계 사태 때 공권력을 투입함으로써 현대차 파업 때 (노조에 밀려)정부의 구조조정 의지가 퇴색했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러나 만도기계에의 공권력 투입은 DJ 정권과 노동계의 관계를 크게 바꿔놓는다. 역대 정권 중 단연 친노동계 정권으로 일컬어지던 DJ 정부와 노동계의 '밀월관계'도 이때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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