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드라마 등급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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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지난 1일부터 TV 드라마에도 프로그램 등급제가 실시됐다. 방송사는 드라마가 시작될 때마다 '모든 연령''7세 이상''12세 이상''15세 이상''19세 이상'의 표시와 자막을 내보내고, 방송 중에도 등급 기호를 10분당 30초 이상 내보내야 한다. 다만 등급을 표시하지 않는 데 대한 벌칙 적용은 10월 31일까지 유보됐다.

드라마 등급제에 대한 방송위원회의 입장은 강경하다.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유해 프로그램에서 보호하기 위해 부모가 시청 지도를 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청자 단체들도 이 입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방송사 쪽으로 넘어 오면 사정이 다르다. 제작진은 물론 등급을 매겨야 하는 심의팀 모두가 "아직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등급을 매기기 위해서는 방송 전에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제작돼 있어야 하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한국적 제작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등급제 실시 첫 주 KBS·MBC·SBS 어느 곳에서도 등급 표시를 띄우지 않았다. 5월 중에도 특별한 계획이 없다고 한다. 기대 속에 출범한 제도가 초반부터 삐걱거리고 있는 셈이다.

방송 현실을 탓하는 방송사측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선진국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프로그램 등급제는 반드시 넘어야 할 단계다. 시청자에 대한 당연한 서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최근 국회에선 TV에 칩을 달아 청소년이 음란·폭력물을 볼 수 없도록 하는 방안까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사측이 '현실론'만을 외치는 건 설득력이 약하다. 이젠 어떻게 제작·심의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가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신 "기준이 모호하다"는 방송사측의 불만엔 방송위원회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드라마보다 먼저 등급제가 실시된 TV 애니메이션 등의 경우 비슷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방송사별로 기준이 들쭉날쭉했던 전례가 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상당수 시청자들이 아직 등급제를 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 시청자들에 대한 홍보를 강화하는 일이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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