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경주,장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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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마지막 퍼팅에서 공을 홀컵에 밀어넣으며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그는 기뻐 날뛰지도, 누구처럼 오른손 주먹을 펌프질하며 포효하지도 않았다. 아내를 조용히 껴안은 채 한동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뜨거운 속눈물을 흘렸으리라. 언어장벽과 문화장벽, 그보다 더 험난한 미국 남자 프로골프의 벽을 한국의 '황색 탱크'가 데뷔 3년 만에 뭉개고 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번 대회에는 타이거 우즈 등 톱 랭커들이 많이 출전하지 않았다. 최경주 선수 스스로 이를 아쉬워하듯 후반 17번홀까지는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로 2위와의 격차를 벌려나갔다. 박세리만큼이나 무뚝뚝하고 다부진 '그린 위의 마이크 타이슨'이었다. 그의 첫승은 별명이 '황색 탱크'로 불리면서 일찌감치 예고됐다. 역도로 다져진 어깨 근육과 탄탄한 다리 힘을 바탕으로 그만의 스타일을 창출해냈고, 피부색이 흑인 같아 보일 정도로 이를 피나게 갈고 닦은 결과다.

게다가 항상 신발 뒤꿈치에 태극마크를 붙이고 다니며 돈이 목적이 아닌, '한국의 대표'로 자처해왔다. 이런 각오와 마음가짐으로 한국인도 프로 본고장에서 통할 수 있음을 10년 아닌 단 3년 만에 세계에 입증한 것이다.

이번 첫승으로 최경주 선수는 우승자들만을 위한 각종 '별들의 잔치'에도 초대돼 슈퍼스타들과 맞닥뜨릴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됐다. 또 박세리가 미국 여자프로대회에 한국 낭자군단의 진출을 이끌어냈듯 한국 남자 프로들의 미국 무대 진출에 견인차 노릇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 남자 프로골프의 원년(元年)이란 말이 터무니없지는 않다.

미국 TV의 인터뷰 기자마저 서툰 우리말로 "축하합니다"라고 그에게 인사했다. 각종 게이트와 비리·의혹에 찌들어 있는 우리 사회에 이 얼마나 기분좋고 상큼한한가닥 바람인가. 슈퍼스타는 저절로 태어나지 않는다. 인재를 일찍부터 발굴하고 인내와 사회적 뒷받침으로 키워내야 한다. 이제 골프에 대한 인식도 바꾸고 '제2,제3의 최경주'를 창출하는 데 적극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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