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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불문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낮은 천장에 질식할 것 같았다-."

1982년 '귀순'했다가 97년 의문의 피살을 당한 이한영씨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김정일의 처조카로 모스크바·제네바 등지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에게 천장 낮은 서울의 아파트 생활이 여러모로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가 아니더라도 외국에 살다 귀국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아파트의 천장이 낮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자기 집인데도 전보다 천장이 낮아진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다. '좁은 땅덩어리에 사람이 많다 보니…'하고 참고 지내지만 조금 키 큰 사람이 손을 뻗으면 천장에 닿는 판이니 정도가 심한 건 사실이다. 천장이 낮은 데다 층간 두께도 얇아 소음 문제로 위·아래층이 다투는 일도 잦다.

그러면 천장이 우리보다 훨씬 높은 외국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해 소음 문제로 이웃과 다투는 것은 사람 사는 곳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얼마전 아래층 독일인의 생일파티에 초청된 적이 있다. 맥주를 한잔 하는데 위층 우리집에서 애들 발걸음 소리가 났다. 크지는 않았지만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 미안하다고 사과했더니 "애들 다 그런 것 아니냐"며 웃고 넘어갔다. 독일의 경우 층간 콘크리트의 두께가 우리의 두배가 넘는 30㎝인 데다 바닥에 카펫이나 목재를 깔아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래서 아파트 같은 공동주택에 사는 독일인들은 몇가지 생활수칙을 지키며 살아간다. '야간 불문율'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피아노는 대개 밤 8시까지 연주할 수 있다. 그것도 이웃이 동의해야 한다. 밤 9시가 되면 보통 어린애들은 재운다. 밤 11시가 넘으면 심지어 변기의 물조차 내리지 않는다. 야밤에 세탁기를 돌리는 사람도 거의 없다. 다 남에게 피해를 안주고 자신도 피해를 받지 않고 살아가는 지혜다. 우스운 일 같지만 밤중엔 부부싸움도 소곤소곤 해야 한다. 소리지르고 싸우다간 옆집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기 일쑤다.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가 며칠 전 의미있는 판결을 내렸다. 아파트 소음의 일차적 책임을 시공사에 물은 것이다. 부실공사가 소음의 큰 원인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는 만큼 늦었지만 아주 적절한 조치란 생각이다. 그러나 독일의 예에서 보듯 시공을 아무리 원칙대로 해도 소음을 완전 차단할 수는 없다. 근본 해결책은 결국 이웃에 대한 배려다. 이제 우리도 나름대로 '야간 불문율'을 만들어 실천해 보자.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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