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17) 북한 대표의 욕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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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7월에 시작한 휴전회담의 북한과 중국 대표들이 회담장인 내봉장 앞에 모여 사진을 찍었다. 왼쪽부터 중공군 대표 셰팡·덩화, 북한의 남일 수석대표와 이상조·장평산의 모습이다. 북한 측 대표는 한결같이 딱딱하고 모진 표정을 지으면서 회담을 지루하게 끌고 갔다. [미 육군부 자료]

휴전을 이룬다면 어느 선을 휴전선으로 획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처음부터 논란이었다. 북측은 아예 자신들이 남침을 시작했던 1950년 6월 25일의 경계선, 38선을 휴전선으로 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그 점은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아군은 제공권(制空權)과 제해권(制海權)을 쥐고 있었다. 그런 유리한 상황에서 저들의 요구를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내부적으로 유엔 측은 ‘현재의 전선 접촉선(接觸線)을 휴전선으로 상정한다’는 입장을 세워두고 있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어떻게 논의할지를 두고 무의미한 신경전이 계속 이어졌다. 따라서 수석대표만이 발언하는 석상에서 내가 할 일은 따로 없었다. 회담에서 최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반영하기 위해 나름대로 주의를 기울였지만, 의제 설정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별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새로운 것은 내봉장 본채 건물의 회담장 뒤에서 늘 기름 냄새가 풍겼다는 점이다. 그 기름 냄새는 고소했다. 나물과 고기를 볶을 때 나는 콩기름 냄새였던 것 같다. 북측 대표들의 식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점심 등 식사를 내봉장 근처에 있는 인삼관에서 했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음료만으로 짜인 식단이었다. 아무튼, 진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회담장에서 내 시선은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회담장에서는 늘 상대편을 쏘아보고 있어야 했다. 달리 발언할 기회가 없으니, 맞은편에 앉은 사람과 눈싸움을 벌이는 게 큰 일이었다. 내 좌석의 건너편에 앉은 이는 북한군 이상조 소장이었다. 인상이 그리 곱지 않은 이상조를 계속 노려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지루한 회담이 계속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측 회담 수석대표인 조이 제독이 마지막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느냐”는 그의 물음에 회의장이 잠시 조용해졌을 때였다.

6·25전쟁 휴전회담 당시 북측 대표를 맡았다가 나중에 소련에 망명한 이상조씨(왼쪽)가 1990년 서울을 찾았다가 백선엽 예비역 대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중앙포토]

그때 이상조가 뭔가를 종이 위에 끼적거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를 향해 그 종잇장을 들어 보이는 것이었다. ‘제국주의의 주구(走狗)는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불끈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저 친구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심리전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을 한다는 생각에 이상조가 밉기는커녕 ‘치졸한 인간에 불과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조는 나를 잘못 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아무런 표정이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대한민국 국군의 대표인 내가 거북스러웠다고 한다. 북측 수석대표인 남일은 함경도 출신답게 우직하고 무뚝뚝한 스타일이다. 이상조는 그에 비해 꾀가 많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중에 그는 정보 계통 쪽에서 일을 한 뒤 주소련 대사 재임 중에 현지에서 망명했다.

그는 민스크라는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1980년대 말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나와 두 번 만났다. 서울의 어느 호텔에선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때 휴전회담을 시작했던 무렵에 내게 보여준 쪽지 기억하느냐”고 내가 물었다.

이상조는 “무슨 쪽지 말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제국주의의 주구라고 하지 않았느냐”며 “그 뒤에 다시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도 써넣지 않았느냐”고 했다. 둘 모두 노년에 접어든 나이라 얼굴을 붉히며 옥신각신한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어조로 그냥 물어본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상조는 한사코 “그런 기억이 없다. 그랬을 리가 없다”며 발뺌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원래 부산 동래의 기장 출신이었다. 나는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었다. 남쪽 출신이 북한 정권을 위해 일하고, 북쪽 출신이 대한민국 전선을 지키다가 회담에 마주 앉은 형국이었다. 그 점이 나중에 생각할 때도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조는 나보다 다섯 살 많은 나이였다. 얼굴은 아주 젊어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회한이 어려 있었다. 북한을 위해 젊음을 바쳐 일하다가 마침내는 김일성 정권에 의해 쫓겨난 사람으로서의 착잡한 감회였을 것이다.

회담장에서 이상조가 그런 욕설을 적은 메모장을 보였을 때 나는 사실 화가 나기는 났던 모양이다. 그날 회담장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조이 제독을 만나 이상조의 메모를 거론하면서 “사실은 한 대 패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이는 그저 웃고 말았다.

그날 나는 일기를 썼던 모양이다. 나중에 들춰본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저 공산주의자들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저 자들을 반드시 앞서기 위해서는 그 방법 말고는 다른 게 없다.” 젊은 내가 가슴 깊이 새기면서 적은 ‘부국강병’, 지금도 그 해답은 마찬가지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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