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입' 매각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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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적을)작은 이익으로 유인하고, 화를 돋워 동요토록 하고, 상대방 모습을 드러나게 하고 자기 모습은 감춰라'.

손자병법에 나온, 싸움에서 이기는 전술의 한 구절이다.

최근 하이닉스 해외매각 협상과정을 지켜보노라면 미국회사는 손자의 가르침을 잘 따른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한국측은 '만나고 싶은 어리석은 적'의 전형 같다.

하이닉스는 마이크론과 30일까지 이사회 승인을 받아야만 효력이 발생하는 조건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22일 발표했다.

넉달 이상 끌어온 협상이건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우리측은 현재 30달러도 안되는 마이크론 주식을 35달러 수준으로 쳐서 대금 대신 받기로 하는 등 상대방 입맛대로 끌려간 형국이다. 게다가 이달말까지 우리측에서 결론을 내줘야 하니 더이상 이해득실을 따질 여유도 없지 않은가.

산업계에선 우리의 총체적인 협상능력 부재와 정부의 조바심이 이토록 불리한 협상을 하게 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하이닉스 협상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터져나온 정부 고위 관계자들의 초치기 발언이 계속 협상자들을 옥죄며, 일을 꼬이게 했다는 것이다.

이근영 금융감독위원장은 20일 미국에서 협상단이 돌아오기 직전에 협상과정 중간발표를 예고했고, 다음 날 전윤철 경제부총리는 TV프로그램에 나가 "하이닉스 채권단이 마이크론측과 기본적인 합의를 본 것으로 안다"며 "이른 시일 내 타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식계약도 아닌 계약여부 결정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을 두고 협상 당사자들보다도 정부 관계자들은 돌아가며 나서서 회사를 팔아버리지 못해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를 세상에 공표해 버린 것이다.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달 하이닉스가 1분기 경상이익 가능성을 발표하자 진념 당시 경제부총리는 "그렇다고 독자생존 조건은 안된다"고 곧바로 마이크론을 거드는 한마디를 했다.

하이닉스의 협상 관계자들은 "협상은 깨질 것을 염두에 두고 밀고 당기는 것인데 우리 정부는 '(우리는 너희에게)이미 팔기로 정했다'고 털어놓은 채 협상에 임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협상력은 없었던 셈"이라고 털어놨다.

아직 하이닉스의 본계약까지는 이사회 및 주주총회 승인 등 험난한 길이 남아 있다. 이제부터라도 협상 당사자들이 일을 잘 매듭지을 수 있도록 모두 과묵하게 앉아 진행상황을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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