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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전 문학서 탄생한 로봇 각박한 현대인의'원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로봇(Robot)이라는 말은 체코어의 '일한다(robota)'는 뜻으로, 192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 K 차페크가 희곡 '로봇(Rossum's Universal Robots)'을 발표한 이래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두산 세계대백과사전』 중 '로봇' 항목.

자, '로봇'이란 말이 최초로 등장한 작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카렐 차페크(1890~1938)의 『로봇』은 한 번쯤 읽어볼만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마징가Z' 'A.I' 등 로봇 만화와 영화의 시원(始原)인 작품이자 SF 만화와 영화를 다룬 책에서 빠지지 않고 "로봇의 기원은 K 차페크의…"로 인용되는 고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82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출간된다는 사실은 놀랍다. 세계 문학 전집에도 빠져있었으니 우리의 지식 혹은 문화 수입 편중 현상이 새삼 실감되는 순간이다.

이런 사실 관계를 떠나 작품 자체를 봐도 『로봇』은 현대 사회와 기술 문명에 대한 놀라운 통찰과 은유로 가득차 있다. 차페크의 작품 구상은 "어느 날 발디딜 틈 없는 만원 전철 안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정확히는 그 안에 있던 현대인들의 굳은 얼굴을 목도하고 나서일 것이다. 사무실에 도착한 차페크는 현대의 삶의 양상을 급히 메모하지 않았을까.

"불편하게 서로 부대끼면서도 얼굴에는 무표정만 가득함. 일만 하고 생각은 터럭 만큼도 하지 않음. 생산과 효율만 따짐. 각각의 고유한 개성보다는 집단으로서의 군중만 존재. 이를 가속화하는 기술. 그래, 이거야 이거, 로봇!"

『로봇』은 서막과 본극 3막으로 이뤄져 있다. 원제는 『R.U.R』로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의 영문 약자이다. 로숨 부자(父子)는 로봇을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부자의 로봇 발명 과정은 기술이 어떻게 자본주의화 되는지 극명히 보여준다. 늙은 로숨이 신의 질서에 맞서는 도전적 탐구열로 로봇을 만들었다면, 젊은 로숨은 "자연보다 느리다면 말도 안돼"라며 기술은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적 동기와 결부돼야 한다고 제창한다.

작품은 이런 내용을 극중 역사적 사실로 깔고 전개된다. 번창 일로에 있는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회사'에 인권연맹 회원으로, 로봇을 해방시키려는 아리따운 여인 헬레나가 찾아온다. 그러나 방문 목적과 달리 헬레나는 사장 도민과 결혼하게 되고 시간은 10년을 건너 뛴다. 생산은 지속되지만 제작상의 실수인지 아닌지 로봇은 분노와 증오 등의 인간적 감정을 갖게 된다. 분노의 집단화는 곧 반역의 시작.

"과거에 우리는 기계였습니다. 그러나 공포와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는 변했습니다."(2호 로봇)

로봇이 로봇을 선동하고 사람들은 죽어간다. 로봇이 인간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로봇은 세상을 평정했음에도 고민에 휩싸인다. 왜? 사랑을 나누는 법을 알지 못하고, 사랑 기능을 내장하지도 못해 로봇 인류의 재생산이 난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결말은 희생과 사랑의 감정을 획득한 두 남녀 로봇의 탈출로 희망을 주고 있다.

압권은 발표 당시 두 개의 커다란 사상적 조류였을 사회주의 혁명(로봇의 반역)과 자본주의의 생산 혁명 찬양(로봇 생산) 모두에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무엇이 인간성을 고양시키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끝까지 살아남은 알퀴스트의 마지막 독백을 들어보자. 그는 로봇 생산에 번뇌하며 참여했던 존재였다.

"생명은 불멸할 것이오! 단지 우리들만 멸망할 것이오. 우리의 집과 기계는 못쓰게 되고, 우리가 이루어놓았던 체계는 붕괴되고…그러나 오직 너만은, 사랑이여, 너만은 이 폐허 속에서 꽃을 피워 생명의 작은 씨앗을 바람에 맡기리라."(1백68쪽)

원작의 탁월성 못지 않게 뛰어난 우리말 구사는 번역 또한 제 2의 창작임을 알게 한다. 그리고 책 후반부를 차지하는 장문의 해설도 작품 이해를 돕는데 더할 나위 없다.

차페크와 역자에게 경배의 술잔을!

우상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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