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삶을 지탱하는 밑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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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오는 28일 대각개교절을 앞두고 원불교의 정신적 지도자인 좌산 이광정(廣淨·66)종법사를 전남 영광군 백수면 길룡리 '영산성지'에서 지난 15일 만났다. 올해로 87번째인 대각개교절은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 박중빈(朴重彬)대종사가 크게 깨쳐 원불교를 연 날을 기념하는 원불교 최대의 잔치다. 대종사가 태어나고 깨달음을 얻은 영산성지는 사방이 연꽃잎 형상을 이루는 야트막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앙과 수행, 생활의 일체화를 최고의 가치로 꼽는 원불교의 정신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그날 그곳엔 산벚꽃이 꽃잎을 떨구며 향기를 떨치고 있었다.

-대각개교절을 맞아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진실의 길을 밟자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현대는 포장의 시대인 것 같습니다. 내용물이 포장과 걸맞지 않아 문제지요. 포장만 강조하다 보니 사람의 진실성이 훼손될까 두렵습니다. 일찍이 도산 안창호 선생은 '우리나라가 쇠망한 원인은 거짓'이라고 못박았습니다. 이 세상의 기초는 진실입니다. 국가도 신용을 잃으면 글로벌 시대에 살아 남기 어렵습니다. 절대로 진실이 무너져서는 안됩니다."

이 대목에서 종법사는 예화를 많이 곁들였다. 그 중에서 "다가올 세상은 밝은 세상이라 악하고 거짓된 사람의 생활은 점점 더 곤궁해지고 바르고 참된 사람의 생활은 더욱 풍부하게 되리라"는 대종사의 80여년 전 말씀이 간절하게 들렸다.

-갈수록 진실이 허물어지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욕심이 지나쳐서 그렇습니다. 과한 욕심을 충족시키려다 보면 염치 없는 짓도 마다하지 않게 됩니다. 욕심을 놓게 되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사람이 지난 길은 뒤끝이 좋아야 합니다. 뒷마무리가 우세스런 사람들을 많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인이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지만 언론인도 자유롭지 않아요. 언론도 진실 쪽으로 국민을 계도해 나가야 합니다."

-현재 언론상황에 대해서도 하실 말씀이 많겠군요.

"중앙일보의 기획 '업그레이드 코리아'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언론이 사회의 거울이라지만, 현실을 반영하는 데서 그쳐선 직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지요. 사회를 향도하는 기능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정치만이 아니라 문화까지도 바르게 끌고 나가야 해요. 통일 문제 또한 마찬가지죠. 현재 보수·진보 진영이 통일에 접근하는 시각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차이를 좁혀 국민의 의식 수준을 높이는 일은 언론이 맡아야 합니다."

-바람직한 정치인상을 말씀해 주시죠.

"소아주의적 자세를 버리고 이타적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정직에 바탕을 둔, 봉공정신이 최고의 자질입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의 유혈충돌에서도 종교간 화합의 중요성이 느껴집니다. 원불교가 이 분야에 특히 적극적인데.

"성경의 '창세기'를 보면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은 형제입니다. 굳이 그런 배경이 아니더라도 상대방을 살려야 나의 생존도 보장받는다는 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종법사는 이 대목에서 남북통일 문제를 한번 더 짚었다. 독일식의 흡수합병을 경계하는 인상이 강했다.

"통일 후 북한의 정치인을 처벌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접근하면 끝없이 불행이 이어집니다. 그들도 다 살린다는 인식을 깔고 통일에 접근하면 분명히 길이 있습니다. 독일의 통일과정을 북한이 연구·분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쪽 위정자들의 의식에는 '통일이 되면 우리는 설 땅이 없어진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요즘 갖가지 수행법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어떤 방법이든 몰두하면 효과는 있는 법입니다. 스트레스 같은 게 해소된다는 말이죠. 그러나 마음은 원리의 세계입니다. 형상이 없다고 해서 원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그 원리의 세계를 무시하고 수행의 단맛만을 고집한다면 비수행으로 전락하고 맙니다.마음의 원리를 찾아 수행하면 근본을 바꾸는 것이기에 뿌리째 변화를 보장받습니다."

-올해 역점 사업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미국 필라델피아에 교역자 양성을 위한 대학원을 설립합니다. 대학원이라고 거창한 게 아니고 작은 규모입니다. 9월 1일 개교하는데 국내에서도 학생 5명 정도를 보낼 예정입니다."

-원불교에서 강조하는 '마음 공부'란 무엇입니까.

"마음의 욕심(바람)이라고 해서 다 나쁘지는 않습니다. 과하니까 나쁘지요. 운명의 결과를 놓고 우연이라든지, 팔자라든지, 밖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길흉화복은 어디까지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미국인은 무의식중에 줄을 서는데 한국인은 무의식중에 사기를 치려 한다고요. 그 무의식의 세계에 보시를 많이 저장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마음은 길흉화복과 무관하지 않고 길흉화복을 끝없이 빚어내는 주체적 존재라는 것을 늘 잊지 않고 마음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좌표로 삼을 만한 글을 원불교 경전에서 하나 꼽아주시죠.

"대종사님이 직접 지으신 『정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처처불상(處處佛像)사사불공(事事佛供), 무시선(無時禪) 무처선(無處禪)이라고요. 곳곳이 부처님, 일마다 불공, 시간없이 선(禪)하고, 장소없이 선(禪)을 하자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처처불상은 타력이고, 무시선은 자력이지요. 사람이면 누구나 자력과 타력의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서양 종교는 타력을 강조하고, 동양종교는 자력에 기울어 있지요. 원불교는 그 자력과 타력을 정확히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종법사는 인터뷰를 끝내고 기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뒤 "꽃 향기와 맑은 공기 흠뻑 마시고 좋은 글 쓰시라"고 주문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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