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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름계 등진 '천하장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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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씨름 천하장사를 지낸 최홍만이 떠나갔다고 떠들썩하다. 씨름계는 모래판을 등진 그에게 진한 배신감을 토로하고 있다. 천하장사 칭호 박탈 등 '씨름 호적'을 정리하려는 딱한 움직임도 보인다.

네티즌들도 시끄럽다. 제 살길을 찾아 떠난 최홍만의 선택을 옹호하는 편이 주류지만 전통 민속경기의 육성.보호에 무관심한 정부, 한국씨름연맹의 무능, 씨름인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도 높다. 2m18㎝.160㎏의 거구 최홍만의 K-1 진출 소동은 1987년 한국 역도의 간판 선수였던 이민우(당시 23세)의 씨름 전향 파동을 연상시킨다.

최홍만은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씨름선수 은퇴와 K-1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24세의 혈기방장한 한 운동선수의 기개는 높이 살 만하다. 앞으로 그는 이종 격투기 세계에서 활로를 개척해 나가야겠지만 그에 반사돼 씨름의 우울한 현실이 눈에 아프게 들어온다. 최홍만은 씨름 천하장사 출신이다. 천하장사는 씨름을 상징하는 최고의 자리고 모래판에서 최고로 힘센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극존칭이다. 천하장사는 우리의 자존심이다. 그 자존심이 나뒹구는 모습은 보기 민망스러울 것이다.

최홍만을 K-1에 끌어들인 흥행 주관사 FEG의 다니카와 사다하루(43)사장은 "최홍만은 일본인에게서 볼 수 없는 뛰어난 체격을 갖고 있다"고 치켜세우면서도 장밋빛 전망을 내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케보노 같은 선수들과 대진을 추진할 작정"이라고 장삿속을 드러냈다. 아울러 그는 "한국의 다른 격투기 선수들도 데려가고 싶다"고 스카우트 공세의 끈을 흔들었다.

스모는 스시.가부키와 더불어 일본이 자랑하는 문화상품이자 국기다. 스모 최고위인 요코즈나는 초특급 대우를 받는 지존의 자리다. 하와이 태생 미국인 아케보노(35)가 바로 요코즈나 출신이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격투기 판으로 뛰어든 2m3㎝.230㎏의 아케보노는 K-1에서 한 게임도 이기지 못했다. 눈여겨볼 점은 K-1이 일본인 요코즈나 출신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스모는 올해 2월 해방 이후 처음으로 이 땅에 상륙,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을 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문부성.외무성 등이 나서 선전에 열을 올렸다. 왕실의 비호와 일본 정부의 세제 혜택 등 보호의 우산 아래 성장 일로를 걸어온 스모와 우리 민속씨름의 남루한 현실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민속씨름은 83년 프로화됐다. 한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프로씨름은 외환위기 사태의 된서리를 맞고 96년 8개나 됐던 씨름단이 내우외환의 소용돌이를 겪으며 3개로 줄었다. 그나마 지난 6일 LG투자증권 씨름단의 공중분해로 명맥 유지는커녕 생사의 갈림길에 섰다. 장기적인 경기 불황, 정부와 기업의 외면 등 외부 요인에다 씨름연맹의 자정 노력 부족과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안일한 운영, 스타 육성 소홀, 고리타분한 경기방식, 마케팅 전략의 부재 등 내부적인 요인이 겹쳐 골병이 들어버렸다.

민속경기에 대한 정부의 무지와 무관심.무대책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저 서슬 퍼런 강압 통치의 시절에는 앞다퉈 이런저런 팀을 만들어냈던 기업체도 '나 몰라라' 손사래를 친다.

황석영의 소설 '장사의 꿈'에 '역시 나는 씨름판에 나서는 게 제일 신나더라. 앞에 떡 버티고 선 놈이 어떻게나 정다워지는지 몰라. 아라랏차차차…. 고함의 신명 나고 소름 끼치게 즐거운 울림이 귀에 쟁쟁하구먼'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귀에 쟁쟁한 장사의 고함, 혼을 일깨우는 그 소리가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씨름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온 씨름인이 지혜를 모아야 하고, 씨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힘을 실어줘야 한다. 무엇보다 스포츠 정책 부재의 이 정부는 민속경기를 살리기 위한 대책을 서둘러 내놓아야 할 때다.

홍윤표 전 씨름연맹 사무총장.폭탄뉴스.com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