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앞이빨로 무 2천개 갉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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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그는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끊임 없이 자신을 갈고 닦지 않으면, 인기란 한순간의 열병에 불과함을 잘 알고 있다. 치열하게 살아 온 그의 인생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5년 전 겨울 어느 날. 김장을 담그는 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리던 개그맨 박준형(29)은 장난 삼아 앞에 놓인 무를 앞니로 갉기 시작했다. 채칼 없이도 뚝뚝 잘려 떨어지는 무 조각을 보고 그의 어머니는 외쳤다."그거 된다~."

그리고 이 비장의 무기를 간직해 왔던 그는 KBS '개그 콘서트'에서 '갈갈이 삼형제' 코너를 통해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자, 무를 주세요." 사제의 주술처럼 청중은 열광한다. 그는 그 기대에 부응한다. 무·파인애플·멜론·호박·수박 등이 그의 돌출된 앞니에 사정 없이 갉힌다. '인간 절삭기'로 통하는 그가 지금까지 갉은 무만 2천개 이상.

"제작진들도 제 이가 보물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이젠 녹화 당일 외에는 연습도 못하게 하세요."

최근 '서세원 쇼' 녹화를 했는데, 유독 그와 서세원씨만이 무에 두 줄의 치아 자국을 남겼다 한다(보통은 네 줄이 남는다). 그래서 서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나눴다고 한다. "콤플렉스까지 있었던 독특한 치형이 제게 행운을 가져다 줄 줄은 몰랐어요."

이런 박준형의 진가는 '청년 백서' '그렇습니다' 등 다른 코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대사와 우스꽝스러운 허리 놀림. 지난달까지 출연했던 '봉숭아 학당' 코너에서도 그는 기상 천외한 사자성어로 시청자들을 배꼽 잡게 만들었다. "하드코어. 아래 하, 머리 두(드), 높을 고(코), 감탄할 어. 내가 머리를 아래로 흔들면 모두 감탄해. 음, 헤드 뱅잉을 말하죠."

박준형은 97년 입사한 KBS 공채 13기 개그맨이다. 그러나 지난해 9월 '개그 콘서트'에 합류하기 전에는 6~7개의 오락·정보 프로그램의 야외 MC를 도맡아 코미디언실에 들어갈 기회도 없었다. 당뇨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2000년 작고)의 치료비와 생계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그는 오후 6시부터 자정까지 영등포 역전의 가요 테이프 장수로, 밤 12시에서 새벽 6시까지는 주유원으로 대학 4년(인하대 경영학과)을 보낸 기억도 가지고 있다.

치아 보호령… 연습도 못하게 해

개그맨이 됐지만 정작 개그맨으로 인기를 얻는 것을 보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이것이 평생의 한이다.

그는 '갈갈이 삼형제'의 다른 멤버인 이승환·정종철 등과 함께 대학로 창조 소극장에서 3년6개월째 '배꼽빼리아'란 제목의 공연을 하고 있다.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이 작은 공간을 지켜나가는 게 그의 꿈이다. 스타가 됐다고 해서 '돈 되는' 무대만 찾아다니는 건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 흔한 매니저도 없고, 소품도 직접 고르러 다니는 박준형. 특히 그는 모든 아이디어를 그와 동료들이 만들어 낼 뿐, 개그 작가의 도움은 일절 받지 않는다. 그의 도전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높은 곳에 올라서도 '헝그리 정신'을 잃지 않는 그 열정 때문인지도 모른다.

글=이상복 기자,사진=주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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