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힘주는 사형수·소년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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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구치소 수인(囚人)번호 4088호. 전국 51명의 미집행 사형수 가운데 최장기수인 김진태(37)씨의 또다른 이름이다.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며 10년을 살았다. 그동안 그는 '모범 인간'으로 거듭났다. 사후에 안구와 신장을 기증키로 서약했고 사형수에게는 면제된 화장실 청소도 자청했다. 하지만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악몽은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됐다.

그러나 석달 전부터 삶이 달라졌다. 하루 하루가 보람되고 초조함도 사라졌다. 경기도에 사는 고교생 朴모(18)군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부터다.

이들의 인연은 지난해 말 시작됐다. 金씨는 어머니가 맡긴 영치금 1백만원을 "보람있게 써달라"며 구치소측에 맡겼다. 돈을 전달받은 안양 부흥사회복지관측은 지난 1월 朴군과 독거노인에게 50만원씩을 각각 전달했다. 朴군은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79)와 7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단둘이 살고 있다. 아주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가출한 뒤부터 할머니와 살아왔다. 요즘엔 朴군이 할머니를 돌본다.

복지관측에서는 혹시나 朴군이 불편해 할 것을 우려해 기증자인 金씨의 신원을 알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朴군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며 복지관을 여러차례 찾아왔다. 복지관 신민선 목사는 고민 끝에 金씨의 인적사항을 알려줬다.집으로 돌아온 朴군은 곧바로 金씨에게 감사편지를 써 보냈다.

"아저씨께서 어려운 상태에서 저를 도와주셨으니 그 마음에 보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2주 뒤 답장이 도착했다.

"가족과 이웃에게 아픔을 안겨 준 인간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해줘 고맙다."

석달 동안 편지가 오갔다. 朴군과 金씨는 이달 중 교정당국의 주선으로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감격의 자리를 가질 예정이다.

金씨는 1993년 7월 아버지(당시 50세)를 살해한 혐의(존속살해 등)로 사형선고를 받고 10년째 복역 중이다. 가족들에게 상습적으로 주먹을 휘둘러온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칼까지 휘두른 뒤 술에 취해 자는 것을 공기총으로 살해한 뒤 시신을 한강에 버린 죄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다.

손민호·신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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